[유재덕 셰프의 요리와 그리고] 핵존맛탱탱구리~ 셰프님 감사합니다

모처럼 근무가 없었던 지난 일요일 오후 창경궁으로 향했다. 연중 가장 아름답다는 5월의 햇살을 만끽하기에 고궁 산책만 한 것이 또 있을까. 호텔 요리사는 주로 실내에서만 일하는 직업이라 늘 햇살이 그리웠다. 계절이 지나는 것도, 세월이 흐르는 것도 요리사에겐 날씨로 감각되지 않는다. 빙수를 만들면서 여름을, 굴 요리를 만들 때 겨울임을 느끼는 식이다.

아! 올해부터는 내가 송아지 정강이 재료를 손질하고 있으면 그건 여름이다. 오소부코(ossobuco)를 우리 호텔의 새로운 여름 메뉴로 선정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송아지 뒷다리 정강이 부위에 화이트 와인을 부어 푹 고아낸 찜 요리로 이탈리아 밀라노 지방을 대표하는 이탈리아 전통 요리다. 오소(osso)는 ‘뼈’, 부코(buco)는 ‘속이 비었다’는 뜻이다. 송아지 뒷다리 정강이 부위를 자르면 뼈 가운데로 골수가 지나는 통로를 볼 수 있어 요리 이름이 이렇다. 밀라노 지방에선 주로 겨울에 먹었다고 하는데, 나는 이 요리의 성분과 효능들을 분석하며 오히려 여름철 보양식으로 제격이라고 판단했다. 이열치열(以熱治熱)의 한국산 지혜를 이탈리아 요리에 접목해 보기로 한 것이다.

이야기가 갑자기 신메뉴 자랑질로 빠졌다. 다시 주말의 고궁 산책길로 돌아가자. 나는 산책 운이 참 좋은 편이다. 자주 하는 산책도 아니건만 내가 갈 때마다 뭔가 특별한 이벤트가 벌어지곤 한다. 궁 안 어딘가에서 유려한 궁중음악 선율이 들렸다. 나는 소리를 따라갔다. 그날 오후 창경궁 문정전에서는 창경궁 명칭환원 40주년 기념 ‘순조 기축년 자경전 야진찬’ 이라는 궁중무용 재현 행사가 있었다. 궁중무용이니 무대의상부터가 비할 데 없이 화려하다.

느리고 우아한 춤사위에 빠져들려는 찰나, 무용수의 얼굴을 보고는 나는 흠칫했다. 몇몇 여성 무용수의 얼굴에 커다랗고 시커먼 점이 찍혀 있었다. 누군가 고약한 장난을 친 것이 분명했다. 얼굴에 커다란 낙서를 하고는 우아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 모습이 웃기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었다. 젊은 대학생들로 보이는데 저런 장난으로 인생의 흑역사가 생기는 건 아닌가 싶었다. 또래의 자녀를 둔 입장에서 마음이 쓰였다.

그런데 그건 나의 오해였고 무식의 소산이었다. 그날 창경궁에서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생들이 펼친 공연은 ‘포구락’이었고, 얼굴에 점을 찍는 장면이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독특한 전통 무용이라는 것을 다음날 알게 되었다. 나는 ‘포구락’을 검색해보았다. 고려 문종 때 들어온 이래 현재까지 900여 년간 전승되어 온 귀중한 춤이라고 한다.

포구락이 펼쳐지는 무대 복판에는 나무로 만든 칸막이가 세워져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구멍이 뚫려 있다. 이 칸막이를 ‘포구문’, 그리고 거기에 뚫린 구멍을 ‘풍류안(風流眼)’이라고 하는데, 포구문을 중앙에 두고 무용수들이 좌우편 양쪽으로 나누어 서서 풍류안을 향해 번갈아 가며 채구(彩毬)를 던진다. 그렇게 승부를 가리는 장면을 춤으로 구현하는 것이 바로 ‘포구락’이라는 궁중무용이다. 이때 던진 채구가 구멍에 들어가면 상으로 꽃을 받고, 만약 들어가지 못하면 벌칙으로 뺨에 먹칠을 해야 한단다. 그러니까 내가 본 것은 학생들의 장난이 아니라 원래 그런 무용이었던 거다.

우리 궁중음악에 대한 선입관이 깨지기도 했다. 그러니까 임금 앞에서 얼굴에 먹칠을 하고 춤을 추었다는 것 아닌가. 조선의 궁중 문화에 이토록 장난스럽고 유머러스한 면이 있었다고 생각하니 흥미로웠다. 언젠가 ‘포구락’을 응용한 유머러스한 전통 한식 메뉴를 한 번 개발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얼굴에 커다랗게 먹칠을 한 채 웃고 있는 조선 여인의 얼굴을 그려 넣은 한과 디저트가 내 머릿속을 지나갔다.

“와… 핵존맛탱탱구리~ 셰프님 감사합니다 ♥♥ 🙂 3415”

다음날 3415호 손님이 남기고 간 메모다.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처음엔 ‘이게 뭔 말인가? 욕인가?’ 하며 긴장했지만, 신입 요리사가 핵존맛탱탱구리의 의미를 설명해 주었다. 우리는 주방에서 크게 웃었다. 정성으로 만든 요리는 이렇게 신기한 부메랑이 되기도 한다. 날려 보낸 건 ‘정성’이었는데, ‘웃음’이 곧장 돌아온다. 이런 맛에 요리사를 한다.

호텔 주방에서 일하면서 칭찬받고 기분이 좋아지는 건 종종 있는 일이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2021년 5월 오픈 이후, 30여 명품 브랜드 기업들이 우리 조선 팰리스 호텔에서 행사를 진행했다. 우리 입장에서 긴장되기로는 아마 명품 브랜드 행사가 최고봉일 것이다. 뭐라 형언하기 어려울 만큼 섬세한 요구가 있고, 우린 그 요구와 기대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부응해야 한다. 이 고객들의 섬세함을 경험하고 나면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가 결코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명품 브랜드 행사를 준비할 때는 주방에서도 고민이 많다. 카나페와 코스별 메뉴들을 어떤 디자인으로 어떤 맛을 낼지 수없이 궁리하고, 궁리하고 또 궁리한다. 메뉴 확정 직전까지 긴장과 스트레스는 한계치에 임박한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명품 브랜드의 기업인 고객들은 겉으로는 까다롭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들은 우리 호텔 직원들에게 가장 세련되고 절제된 매너를 보여준다. 우리를 존중하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명품을 만들어 파는 사업가라기보다는 예술가로 느껴졌고 성품과 태도 자체가 명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이 우리 호텔에 다시 찾아온다면 더 완벽하게 서비스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절로 든다. 이들이 세계적인 브랜드를 만들고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랄까? 아니 비결을 넘어 경영의 이념, 혹은 기업의 철학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 어떤 어려운 행사라도 우린 자신 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호텔인 우리의 서비스 역시 명품이라는 긍지가 있기 때문이다.

샤넬을 상징하는 검은색과 흰색이 조합된 한국도자기 제품. 어렵게 구한 제품으로, 다기 그릇에도 정성을 쏟았다.

샤넬의 최연소이자 최초의 여성 CEO로 임명된 리나 나이르(Leena Nair) 대표는 세계적인 명사다. 그는 우리 호텔에서 커피 브레이크 행사에 제공한 수제 한식 다과를 보고는, 행사가 끝난 후까지 혼자 남아 그 다과를 다 드셨다. 샤넬의 상징 컬러로 색을 맞춘 ‘광주요 칠절판 한식 다기’를 천천히 살펴본 후 “자기 회사만을 위한 섬세한 서비스에 크게 감동하였다”고 따로 감사의 말을 전해왔다. 그는 “수많은 나라의 호텔들을 다녀 봤지만, 이런 정성까지 느낀 것은 처음이다”라는 말도 덧붙였다.

고객들의 이런 칭찬 메시지를 받을 때마다 진심으로 기쁘다. 우리의 마음이 고객의 마음으로 고스란히 전달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 따뜻한 소통이 주는 행복감은 형언하기 힘들 정도다. 굳이 말로 표현해야 한다면, 3415호 손님이 써주신 메모 “핵존맛탱탱구리~” 만큼이나 기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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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덕 조선 팰리스 EXECUTIVE CHEF
“요리는 특별한 것이지만, 음식은 위대한 것이다!”
100여 년 전통의 조선호텔앤리조트에서
지난 30년간 함께 역사를 쌓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