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앤모어 양윤철 점장의 마셔보고서.txt] ○○년은 ‘망빈’? 와인 빈티지의 오해와 진실

2023년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네요. 이제 남반구의 와인 라벨에는 2024년이 적혀 나오겠죠. 우리가 와인을 고를 때 많이 보는 요소 중 하나가 바로 라벨에 쓰여 있는 숫자 ‘빈티지’입니다. 이 빈티지는 “해당 와인을 만든 포도의 수확 연도”라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와인앤모어에 있으면 고객들에게 여러 질문을 듣습니다. 그중 하나가 “빈티지는 오래될수록 좋죠?”라는 질문입니다. 전 늘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라고 대답해요. 무슨 말이냐고요? 김치를 예로 들면 쉽습니다. 겉절이는 갓 나온 김치가 가장 맛있지만, 김장김치는 갓나왔을 때도 맛있고 숙성해서 묵은지 형태로 먹어도 좋죠. 김치가 용도에 따라 숙성 정도가 다르듯, 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장기 숙성을 생각하고 만든 와인이면 1년 2년 지나면 점점 복합성을 가지지만, 그렇지 않은 와인은 해가 너무 지난다면 와인이 가진 표현력이 점점 떨어지겠죠. 와인마다 표현력이 정점을 찍는 시기가 다를 뿐입니다.

또 흔히 하시는 생각이 ‘빈티지가 좋지 않으면 와인도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는 진짜일까요?

판교지역의 와인앤모어에서 근무할 때였는데요. 그 당시 보르도 지역의 그랑크뤼 와인에 2013빈티지가 많았습니다. 참고로 2013년은 기상이변이 심한 해로, 기후조건에 예민한 포도 작황에도 큰 영향을 미쳤죠. 따라서 2013빈티지는 좋지 않은 빈티지로 인식되고, 심지어 망한 빈티지라듣 뜻인 ‘망빈’이라고 부르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이러니 많은 분들이 2013빈티지 구매를 꺼리셨죠.  

반면 인기가 좋은 빈티지도 있습니다. ‘황금 빈티지’로 불리는 2015, 2016년이 그렇습니다. 어느 빈티지인지에 따라서 같은 와인이라도 가격이 천차만별이기도 하죠. 좋은 햇빛 속에서 영근 포도로 만든 와인은 맛도 뛰어난 게 당연지사인 듯한데. 우리 입에도 정말 그러할까요?

빈티지에 따른 맛의 차이를 알아보기 위한 블라인드 테이스팅 현장

사실 저는 언젠가부터 빈티지 점수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점을 사람들하고 공유하고 싶어졌어요. 더불어 일반적으로 ‘좋은 빈티지’라 하는 와인을 블라인드 테이스팅으로 다른 빈티지 와인과 비교해 보았을 때, 실제로 사람들이 좋다고 느낄지도 궁금해졌죠. 그래서 이번 시음을 마련하였습니다.

끌로 생 미셸 샤또뇌프 뒤 빠쁘 레드
Clos Saint Michel Chateauneuf-du-pape Rouge, Tradition
도멘 기 무쎄에서 만드는 가장 클래식한 CDP레드

와인은 ‘끌로 생 미셸 샤또뇌프 뒤 빠쁘 레드’로 결정했습니다. 빈티지마다 3,500 케이스씩만 소량 생산하며 약 1년간 오크 배럴에서 숙성을 거친 뒤 출시되는 와인인데요. 섬세한 와인이라 맛을 구별하기 좋고, 장기 숙성이 가능한 잠재력이 있어서 연도별 테이스팅을 할 수 있는 요건이 되었습니다. 이번 테이스팅 주인공으로 딱 맞았어요.

이번 시음회는 업계인 3명, 비 업계인 6명, 총 9명이 참여하였습니다. 2010년에서 2015년 사이의 모든 빈티지가 나온다는 점과 와인의 특성을 미리 안내했습니다.

시음하기 전에는 제가 각종 자료를 분석하여 오늘 시음할 와인의 각 연도별 평균 점수를 도출해 두었습니다. 세계적인 와인 전문지 및 와인 검색 사이트 등 총 5곳이 평가한 점수로 평균을 내보았습니다. 종합적으로 2010년과 2015년이 좋은 점수를 받았네요.

테이스팅은 총 3가지 섹션으로 나눴습니다. 첫 번째 섹션은 좋은 빈티지라 평가받는 2010년과 상대적으로 빈티지 점수가 낮은 2011년으로 구성했습니다. 두 번째 섹션은 2012, 2013년으로 조합했고, 세 번째 섹션은 점수가 낮은 2014년과 점수가 높은 2015년 빈티지로 진행했습니다. 사실상 2010년부터 2015년까지 순서대로 시음하도록 구성한 셈입니다. 다만 참가자들에게는 모든 빈티지가 임의로 섞여 있다고 말했습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지금까지 제가 진행한 블라인드 테이스팅 중 참가자들의 반응이 가장 놀랍고, 뜨거웠습니다. 이런 놀라움을 보는 게 준비한 사람으로서 가장 즐거운 순간이죠.

섹션 1. 2010 VS 2011

빈티지 평가를 참고하면 오늘 테이스팅 중 2010년은 가장 점수가 높은 빈티지고, 2011년은 점수가 낮은 편에 속하는 빈티지입니다. 하지만 섹션 1에서부터 이는 그저 숫자일 뿐이라고 느끼게 됐습니다.

놀랍게도 참가자 9명 중 7명이 빈티지 평가가 더 나빴던 2011년을 선택했습니다. 사실 거의 모든 참여자는 두 와인 모두 훌륭하며 둘 중에 더 나은 걸 고르기 어렵다는 반응이었습니다. 다만 2011년 와인이 숙성이 깊은 와인 같다며 이를 선택한 분이 많았습니다. 오히려 반대였는데 말이죠.

 

섹션 2. 2012 VS 2013

두 와인 모두 참가자들이 좋아해 주셨고, 2012년 빈티지가 근소하게 조금 더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2012년을 좋아하는 분은 ‘숙성된 맛이 좋다’, ‘차분하다’ 등의 평가를 하셨고, 2013년을 선호하는 분은 ‘가볍고 살짝 신맛이 매력적’이라 평했습니다. 섹션 2는 섹션 1과는 다르게 빈티지 점수와 참여자들의 선호도가 일치했네요.

 

섹션 3. 2014 VS 2015

가장 재밌었던 섹션입니다. 2014년 빈티지는 이번 테이스팅 와인 중 가장 낮은 평가를 받은 빈티지인데도 절반의 참가자 분들이 선호하였습니다. 이번 평가에 영향이 있었던 한가지 포인트가 있다면 2015년 빈티지가 가지고 있었던 ‘게이미한 풍미(가축들에게 날 수 있는 야생의 향)’인데요. 이 요소 때문에 오히려 참가자들은 2015년 빈티지가 오히려 오래되었다고 느꼈나 봅니다. 이 와인의 복합성과 단단함은 몇몇 참가자들이 편하게 다가가지 못하는 요소가 되더군요. 빈티지 점수는 극과 극인데, 테이스팅 자리에서의 평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번 블라인드 테이스팅에서 9명의 참가자는 각자 본인의 취향에 맞는 와인을 높게 평가했습니다. 결과는 와인 전문지 등에서 평가한 빈티지 점수와는 큰 연관이 없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망빈’ 2013년 빈티지 기억나시나요? 참고로 요새는 상황이 많이 바뀌었답니다. 지금 마시기 좋은 빈티지 중 하나로 2013년 빈티지를 추천해 드리고 있고, 많은 분이 좋아하고 계십니다. 저도 아쉬워하는 지인들에게 “그러니까 그때 사라니깐……” 하며 웃으며 타박하기도 하죠.

또 재미있는 평가가 하나 있습니다. 전 세계 와인 마니아들의 커뮤니티죠. 대중의 입맛을 담기로 유명한 ‘Vivino(비비노)’의 빈티지 평가인데요. 전문지 등에서 평균적으로 높게 평가한 2010, 2015 빈티지는 상대적으로 점수가 낮은 반면, 저평가 받은 2012, 2013 빈티지는 꽤 점수가 높습니다. 이번 테이스팅에서 참가자들이 전반적으로 좋다고 평가한 섹션 1,3 파트가 비비노에서는 좋지 못한 점수를 받았고, 오히려 섹션 2 파트가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여러 매체의 평균값, 비비노, 오늘의 블라인드 테이스팅 모두가 각자 다른 결과가 나온 것이죠.

그만큼 와인은 주관적입니다. 어느 날 한번은 좋은 기회로 프랑스의 와이너리 관계자를 만났는데요. 그에게 와인의 빈티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니 “빈티지는 와인을 판단하는 좋은 요소이지만, 너무 빈티지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는 말을 하더군요. 빈티지가 좋은 해인데도 불구하고 입에 안 맞는 와인이 있고, 나쁜 해여도 내 입에는 보석처럼 빛나는 와인들이 있다는 거죠.

전문가의 평가에, 남들의 평가에 휘둘리지 마시길 바랍니다. 시중의 빈티지 점수로 와인을 정의하기보다는 직접 마셔보고 느껴보세요.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되는 빈티지가 내 취향에 딱 맞는다면, 그만큼 행운이 또 어디 있을까요? 한편으로는 저도 이번 시음을 통해서 올드 빈티지와 영 빈티지 사이의 다른 점을 고객들께 좀 더 정확하게 전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네요. 2024년도 여러분의 취향에 딱 맞는 와인이 나오리라 확신하며, 오늘도 EN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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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윤철 와인앤모어 서울숲점 점장
마시는 게 좋아 일하는
와인앤모어 점장이
쓰는 게 좋아져 시작한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