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지금은 크리스마스 이브입니다. 아침에 창밖을 보니 밤새 수북이 쌓인 눈이 온 세상을 고요하게 덮고 있습니다. 모처럼 만에 하얀 눈을 보니 어느덧 한 해를 마무리하는 세밑에 와 있다는 것이 실감 납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우리 유통시장은 팬데믹과 엔데믹을 오가며 그야말로 격동의 세월을 견뎌야 했습니다. 이처럼 거대한 파도가 유통시장을 온통 휩쓸었던 적이 또 있었던가 싶기도 합니다. 세밑 하얗게 쌓인 눈이 지난날의 상흔을 덮고 새로운 시대의 전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 해 유통시장을 반추하고 넥스트 리테일 시대를 조망해 보고자 합니다.
2023년은 고물가, 고금리 영향으로 인해 우리 국민들의 실질 가처분 소득이 곤두박질쳤던 한 해였습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2분기에는 실질 가처분소득이 전년 동기 대비 5.9% 줄어들어 17년 만에 최대폭으로 감소했습니다.
또한 2023년은 코로나19로부터 일상으로의 완전한 회귀를 알리는 엔데믹이 선언된 해이기도 합니다. 지난 5월 엔데믹이 선언되면서 실내 마스크 착용 의무도 해제되었습니다. 이처럼 경기 불황과 엔데믹 선언이 동시에 이루어지면서 유통시장의 출렁임은 한층 심화되었습니다.
가처분 소득이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도 3년 4개월 만에 맞은 엔데믹이 가져다준 해방감으로 인해 우리 국민들의 해외 소비는 80% 이상 급등하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해외여행을 가지 못한 국민들도 국내 여행, 레저, 공연 등 그동안 참아왔던 욕구를 분출하면서 서비스 소비 지출을 크게 늘렸습니다.
주머니 사정이 얇아진 가운데에서도 그동안 억눌려왔던 여행 등에 대한 지출을 크게 늘리다 보니, 상품 소비에는 지출을 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로 식품이나 생필품 중심으로 소비하고 비필수재 소비를 줄이는 패턴들이 나타났습니다. 이에 따라 전체 소매시장은 인플레이션 영향을 제거한 실질 기준으로 소폭 역성장(-0.3%)을 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명목 기준으로는 인플레이션 효과로 인해서 3.2% 성장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전체 채널 가운데 유의미한 성장을 한 채널도 편의점과 온라인에 불과합니다. 최근 1~2인 가구 비중이 전체가구의 66%에 달할 정도로 증가하면서, 이들 소비 트렌드의 힘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2024년에도 소매시장은 녹록지 않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적어도 상반기까지는 현재와 같은 고물가, 고금리의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입니다. 2024년 하반기부터 고물가, 고금리 현상이 점차 완화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년에 비해서는 여전히 높은 수준을 유지할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우리 국민들의 지출처가 2023년에 여행 등 서비스 소비에 크게 쏠렸다면, 2024년에는 엔데믹 효과가 소멸되면서 서비스 소비와 상품 소비 간의 균형점을 찾아갈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에 따라 명목 소매시장 성장률은 2023년 3.2%에서 2024년에는 다소 개선된 3%대 중후반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그러나 인플레이션 영향을 제거한 실질 기준으로는 여전히 1%대 저성장이 예상됩니다.
최근 몇 년 동안 국내 유통시장은 실질 기준으로 1% 내외 저성장을 보이면서, 제로섬(Zero sum) 경쟁 양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제로섬 경쟁이라는 것은 내가 100을 얻으면 상대가 100을 잃고, 상대가 100을 얻으면 내가 100을 잃게 되는 게임입니다.
고성장기에는 다 같이 성장할 수 있었지만, 최근 저성장기에 들어서면서 같은 채널에 속한 기업 간에도 상위권 기업들과 하위권 기업들 간의 실적 차별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습니다. 시장은 가뜩이나 제로섬 경쟁으로 치닫고 있는데, 근래 들어 알리익스프레스, 티무, 쉬인 등 중국 직구 플랫폼들까지 경쟁에 가세하고 있습니다. 인구감소 현상까지 더해지고 있어서 유통기업들이 기존처럼 상품 시장만 놓고 경쟁한다면 결코 제로섬 게임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2023년 우리 국민들의 소비패턴을 보면 답이 보입니다.
한정된 소득으로 엔데믹 전환에 따라 여행, 공연, 레저 등 서비스에 대한 지출을 크게 늘리다 보니, 결과적으로 상품 소비는 줄었습니다. 결국 유통 업체들의 경쟁상대는 같은 유통시장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행, 문화, 레저 등 국민들의 소비 지출 범주 안에 있는 모든 활동이 경쟁상대인 것입니다.
핵심 소비층의 세대교체도 본격화되고 있습니다. 기존 물질에 대한 소유 욕구가 높았던 베이비부머에서 경험에 대한 욕구가 높은 MZ 세대로 교체되고 있습니다. 최근 미국의 쇼핑몰들에도 실적 차별화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실적을 가르는 요소는 ‘얼마나 매력적인 엔터테인먼트 요소, 커뮤니티 기능을 갖추고 있느냐’*에 있다고 합니다.
* RetailWire, Sep. 29, 2023
유통 매장이 기존처럼 상품만 판다면 성장에 한계가 있습니다. 한 해 우리 국민들의 해외 소비는 37조 원에 달하고, 오락, 스포츠 및 문화에 지출하는 금액은 60~70조 원에 달합니다. 유통매장이 여행이나 레저 이상의 만족감과 경험을 줄 수 있다면 다른 서비스 시장의 수요를 일부 흡수하면서 인구감소 시대에도 추가적인 성장을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유통의 범위를 엔터테인먼트, 커뮤니티 기능 등으로 확장해서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과연 어떻게 하면 여행, 레저로 향하는 고객의 발길을 유통시장으로 유인할 수 있을지 로버트 그린의 저서 <인간 본성의 법칙(The Law of Human Nature)>에서 힌트를 찾아봅니다. 그는 “무엇이 되었든 당신이 제안하는 것은 새롭고 낯설고 이국적이어야 한다. 당신의 제안이 기존의 뻔하디 뻔한 것들과 대조를 이룬다면 고객들에게 선망의 끌림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라고 역설한 바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예술과 과학, 건축 등에 대한 관심을 하나로 융합해 사람들의 관심과 시선을 끄는 독창적인 작품들을 만들어 냈듯이, 기존의 다양한 영역을 새롭고 창의적인 방식으로 결합해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2024년에는 기존에 보지 못했던 독창적인 매장 프로토타입들이 연이어 나오면서, 시장의 게임 체인저가 되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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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 이마트 유통산업연구소 소장
현재에서 미래를, 미래에서 현재를 부감하며
리테일의 변화 방향을 탐색하는 리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