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식,미식,편식:정동현의 三食일기] “저는 짜게먹습니다”

2015/11/24

소금을 한 줌 먹어본 일이 있는가? 순대에 딸려나오는 꽃소금을 한방에 털어넣었다고 하면 감이 오려나, 정확하게는 두 봉지 분량을 한 방에 탁! 하고. 해본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절대 하지 말라고 권하고 싶다. 아무리 호기심이 충만해도, 용기가 넘쳐나도, 그것만은 말리고 싶다.

“윽.”

고통스러웠다. ‘짜다’라는 단순하고 냉정한 형용사로는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었다. 혓바닥의 세포들이 소금에 절여지는 것 같았다. 더불어 왜 옛날 고문을 할 때 상처에 소금을 부었는지, 덤으로 알게 되었다. 나는 왜 그랬을까? 그만큼 악에 받쳐 있었다. 다 소금 때문이었다.

   

“간을 더(more seasoning).”

백이면 백, 나의 냄비는 되돌아왔다. 호주 멜버른의 한 호텔, 올해의 셰프로 뽑히기도 했던 영국 런던 출신, 잘생겼던 나의 헤드셰프 존(John)은 반백발의 무리뉴 감독처럼 냉정했고 그의 혀는 그랙 메덕스가 던진 공처럼 예리했다. 그리고 나는 믿음이 부족한 신자였다.

‘더(more)?’

차마 입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다시는 떠올리기 싫은 하루가 될테니까. 그러나 의심은 거둬지지 않았다. 도대체 얼마나 더 소금을 넣으란 말인가?

 

 

소금, 간 맞춤 그 이상

이 내적 갈등은 요리학교 때부터 시작됐다. 소금 그리고 버터는 요리학교에서 가장 많이 쓰는 재료였다. 서양 애들도 눈이 휘둥그래지도록 퍼쓰던 버터는 그렇다치더라도, 서양식 ‘간맞춤’은 내가 요리학교에서 가장 먼저 마주친 새로움이었다.

“리얼리?”

“예쓰!”

인심 좋아보이던 아줌마 선생님도 간을 볼 때만은 단호했다. 왜냐면 어떤 요리든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서양 요리에서 소금 간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선 한식처럼 간을 보조할 수 있는 매운맛이나 감칠맛이 흔하지 않다(MSG를 넣으면 소금을 적게 써도 된다). 더구나 크림이나 버터 같은 유지류를 많이 쓰기 때문에 웬만큼 간을 해서는 표시도 나지 않는다. 또한 요리의 중심이 되는 소스를 한국처럼 마시지 않기에 염도가 높더라도 괜찮다.

소금의 역할은 단지 짠맛을 가미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소금은 어렵게 말해서 수용액 속의 이온의 힘을 증가시켜, 냄새 분자가 음식으로부터 쉽게 분리될 수 있게 만든다. 쉽게 말하면 소금을 넣으면 향이 더 두드러진다. 게다가 음식의 잡맛과 쓴맛을 없애주고 재료가 가진 맛을 더 두드러지게 한다. 어떤 바리스타들은 그 이유로 커피를 내릴 때 소금을 조금 치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서양식 소금 치기 요령은 ‘끝’까지다. 조금이라도 더 넣으면 ‘짜다’고 느끼기 직전까지 소금 간을 한다. 아슬아슬하게 간을 하면 맛이 쨍하게 살아난다. 마치 포토샵 보정 버튼을 클릭하면 흐릿했던 그림자가 걷히는 것과 같다. 단호박 수프를 끓일 때 단맛을 더하기 위해서 설탕 대신 소금을 넣는 이유다. 스테이크를 구울 때 고기에 소금을 치는 것은 단지 간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앞서 말했듯 고기의 잡내를 잡아주고 숨은 맛을 이끌어내기 위해 소금이 필요하다. 무염버터와 가염버터의 차이도 생각해보시라. 100g의 가염버터에 든 소금은 2g 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맛은 천지 차이다.

사실 이런 팩트를 알려면 하룻밤이면 족하다. 어려운 것은 몸으로 느끼는 것이고, 더 어려운 것은 그 맛을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레스토랑 주방에 갓 발을 내딛은 그때, 나는 존이 만들어 놓은 그 맛, 그 염도를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나의 험난한 ‘소금의 맛’ 정복기

“어게인.”

내가 만든 폴렌타(polenta, 이탈리아식 옥수수죽)를 앞에 두고 존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간이 부족했다. 손님이 밀어닥치는 저녁 시간, 다시 냄비를 가져다가 소금을 뿌리고 간을 맞추기엔 너무 급했다. 답안지를 밀려 썼는데 시험 시간이 10분 밖에 남지 않은 것 같았다. 매일 계속 같은 음식을 만들어야만 알 수 있는 그 미묘한 차이, 존은 100이 아니라면 95도 만족하지 않았다.

“너무 짜잖아!”

그러다 기어코 사달이 났다. 영점을 조절하듯 조심스러워야 했건만, 내 인내심은 바닥이 났다. 한 번에, 그 100점을 맞추겠다는 욕심에 소금을 ‘조금’ 많이 넣었더니 100이 아닌 110이 되었다. 먹을 수 없는 요리가 된 것이다. 존의 고함 소리가 주방을 절반으로 찢어버리는 것 같았다. 그게 시작이었다. 나의 리듬은 어긋났고 존의 욕지거리는 나만을 향했다. 시간은 천천히 흘렀고 주문은 인정사정 없이 밀려올 뿐이었다. 땀이 흘러들어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피크 타임의 한 복판 어딘가,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내 손아귀에는 소금이 있었다. 그때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고3 시절, 나는 틀린 시험지를 찢어 먹곤 했다. 그 심정으로, 나는 앙갚음이라도 하듯 소금을 입 속에 집어 넣었다. 뇌가 흔들리고 혀가 뽑히는 것 같았다. 그날, 내 입에서는 소금기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 수모를 당한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주방에서 나가는 모든 음식을 먹어보는 존의 입에 딱 걸리면 욕지거리는 예사요, 심하면 냄비가 날아다닌다. 사흘 뒤 동료 요리사에게 그런 날이 찾아왔다. 인도 출신, 그 착한(나를 많이 도와줬다는 뜻이다) ‘싱’의 냄비가 주방 바닥에 나뒹굴고 폴렌타는 주방 바닥에 엎질러졌다. 존은 세상에서 가장 심한 모욕을 들은 것처럼 얼굴이 뻘개져서 식식거렸다. 영국 악센트로 하는 욕은 또 어찌나 귀에 쏙쏙 잘 들어오는지, ‘발음 참 찰지다’, 생각할무렵 부주방장이 냄비를 나에게 드밀었다.

“네가 대신 해.”

밥 한 그릇 더먹으라는 권유였다면 ‘괜찮다’고 짐짓 거절했을텐데, 그것은 아니되오, 하라면 하고 까라면 까는 주방에 있었다.

“예쓰.”

사흘 전 그날처럼 나는 냄비를 잡았다. 사실 조리랄게 없었다. 폴렌타에 육수와 우유를 조금 넣고 데워주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최후의 관문이 있었으니 그것은 사흘 전 나에게 고통을 안겨준 소금 간이었다. 열을 받은 폴렌타가 부글부글 끓었다. 이제 소금 차례, 하얀 소금을 집어 뿌렸다. 조금씩 색칠을 하듯이, 여리디 여린 꽃을 쓰다듬듯이. 음. 맛을 보니 약간 부족하다. 조금만 더 살짝. 아. 거의 다 됐다. 97점 정도 됐을까? 슬쩍 고개를 돌려 옆으로 보니 나의 헤드셰프 존이 으스스한 기운을 내뿜으며 서 있었다. 밖에는 배고픈 사람들이 레스토랑에 바글댔고 앞으로 나가야할 음식이 줄을 서 있었다. 이번이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소금을 더했다. 저 옛날 용 그림에 눈을 그려넣던 화가의 심정이 그랬을까? 폴렌타를 입에 넣었다. 짰다. 그러나 짜지 않았다. 이게 무슨 말이냐는 소리가 들린다. 짜면서도 짜지 않다니. 그 맛에는 긴장감이 있었다. 조금만 건드리면 흐트러질 것 같은 절묘한 균형, 내 입으로 100점이라고 하긴 뭐하니, 한 99점 정도였달까? 딱 이거다 싶었다. 존은 내가 넘긴 폴렌타의 맛을 보더니 고개를 가로가 아니라 세로로 끄덕였다. 그리고 던진 한 마디.

“이 맛을 기억해.”

 

 

 

“저는 짜게 먹습니다”

아마 존이 한국에 온다면 그 잘생긴 얼굴이 여러번 구겨졌을 것이다. 그만큼 한국에서 식사를 하다보면 간이 안 된 음식을 자주 만난다. 특히 양식이 그렇다. 싱겁게 먹는 것이 마치 문화적인 우월감을 드러내는 하나의 도구가 된 것 같다. 음식 평을 할 때도 ‘짜다’는 말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른다. 마트 선반에 가면 짜지 않은 소금이 있고, 간이 되지 않은 파스타가 ‘짜지 않아 좋다’는 평을 받으며 널리 팔린다. 그 배후에는 저염식이 건강에 좋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아직 나는 저염식이 건강식이라는 납득할만한 증거를 수집하지 못했다. 버클리 대학의 통계학자 데이비드는 고염식이 고혈압의 원인이라는 가설은 잘못된 통계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혀냈다. 대신 김치에 소금을 적게 써 김치를 먹고도 식중독에 걸리는 일이 생겨났다. 소금을 적게 쓰니 김치가 발효되지 않고 부패한 것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짜게 먹자는 게 아니다. 단지 짜야 할 것이 짜지 않고, 오로지 ‘짜다’와 ‘싱겁다’로 구분하는 맛 평가의 몰상식함에 짜증이 치밀었을 뿐이다. 하긴 그것이 사람들 잘못이랴. 사회가 모든 잘못을 개개인의 책임으로 몰아세우니 내 한 몸이라도 건강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보신주의가 판을 치는 것이다. 사람들은 시시각각 메뚜기떼처럼 보신음식의 유행을 타고 여기에서 저기로 바쁘게 넘나든다.

나는 여전히 존이 나에게 기억하라고 말하던 그때 그 순간, 그 맛을 잊지 못한다. 입안에 가득히 머금은 그 짠맛이 외줄타기를 하듯 똑바로 균형을 잡았을 때의 그 맛을, 그 희열을. 그래서 나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저는 짜게 먹습니다.”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