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사람들의 입맛은 빠르게 변하고 매년 새로운 술들이 수백 가지씩 쏟아져 나옵니다. 저마다 독특한 맛과 향, 화려한 패키지 디자인으로 무장하고 있죠. 내용물은 같은데 새로운 재미 요소를 주기 위해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술 용기 디자인만 바꾸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로라 하는 튼튼한 간을 가진 술꾼조차도 끝없이 출시되는 술들을 다 맛보기 버거울 정도입니다.
과연 언제까지 계속 새로운 술들이 탄생할 것인지, 몇 몇을 제외하고는 재료의 조합이 조금씩 바뀌거나 새로운 재료를 섞는 정도가 대부분인데 과연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있는지’ 의문이 들기 시작하는 이 시점에서, ‘옛 것을 돌아보고 새 것을 만들어낸’ 주류 브랜드들을 소개해봅니다.
19세기의 보르도 와인을 재현하다,
팔머 히스토리컬 19세기 와인(Palmer Historical 19th Century Wine)
|샤또팔머 전경
이 와인의 독특한 제조 스토리를 이해하려면 먼저 1935년에 제정된 프랑스의 원산지호칭통제제도(AOC, Appellation d’Origine Controlee)에 대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정부가 와인에 쓰이는 포도의 원산지, 포도재배와 수확, 양조 방법 및 결과물(알코올 도수 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을 확인하고 규제해 생산자를 보호하고 소비자에게 제품에 대한 신뢰를 확보해주기 위한 제도입니다.
가령 와인 레이블에 ‘보르도’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위의 요건들을 모두 충족시켜야 하며, 이로써 ‘보르도’라고 명시된 와인에 대해서는 소비자들이 일정 수준의 품질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19세기의 보르도는 지금과 달랐습니다. 당시 보르도의 레드 와인은 지금보다 엷은 색상과 묽은 농도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보르도 지방이 아닌 북부 론의 진하고 강건한 스타일의 시라 포도를 섞는 양조 스타일이 성행했습니다. 이 와인들은 당시 최고급 와인의 대명사와도 같았던 ‘에르미타쥐’라는 이름을 붙여 판매되며 크게 유행했습니다.
3백여 년간 잉글랜드에 속해있던 보르도에서는 프랑스와 영국의 백년전쟁 이후에도 양조하는 와인의 대부분을 바다 건너 잉글랜드에 수출했는데, 특히 이런 ‘에르미타쥐’ 스타일의 와인이 인기였습니다. 그랑 크뤼(Grand Cru, 특등급 포도원) 등급을 받아 명실공히 최고의 품질과 명성을 자랑하는 생산자들도 당시엔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1935년 AOC 제도가 도입되며 이렇게 다른 지방의 포도를 섞어 만드는 와인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21세기에 이르러 프랑스 보르도의 오메독 마을에 위치한 생산자 샤또 팔머(Chateau Palmer)는 우연한 기회에 이 와인을 부활시키게 됩니다.
샤또 팔머의 양조팀이 미국을 방문하던 중 한 와인수집가의 개인 셀러에서 샤또 팔머 1869년산을 맛보게 되었는데, 지금의 팔머 와인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병 라벨에는 당시의 유행대로 ‘에르미타쥐’라고 적혀 있었고, 이들은 프랑스로 돌아와 이 와인을 복원해보기로 결정했습니다.
와인의 이름은 ‘팔머 히스토리컬 19세기 와인(Palmer Historical 19th Century Wine)’으로 정했습니다. 잊혀진 19세기의 고급 보르도 와인을 그대로 재현한다는 의미이지요. AOC 규정을 무시하고 당시의 방식대로 보르도와 론 두 군데에서 재배한 포도를 사용했고 몇 가지 수확연도의 포도를 섞었기 때문에 규정에 따라 등급 없는 와인으로 출시했습니다. 보르도 와인의 우아함, 섬세함과 함께 론 와인의 강렬하고 진한 맛이 절묘한 균형을 보여주는 와인이 탄생했습니다.
첫 해에는 딱 4개 배럴만 만들어 미국, 일본, 프랑스에만 시험적으로 선보였고, 작년에 신세계 L&B를 통해 국내에 단 여섯 병 들어온 세 번째 버전은 까베르네 소비뇽 45%, 메를로 45%에 북부 론의 와인을 10% 블렌딩해 만들어 첫 해보다 더 안정되고 완숙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천년 전 우리 술을 복원하다, 사시통음주(四時通飮酒)
연암 박지원이 쓴 ‘법고창신(法古創新)’이라는 말은 ‘옛 것을 바탕으로 새 것을 창조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국순당의 우리 술 복원 프로젝트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간 문헌으로만 전해 왔던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담긴 술을 복원해 세상에 내놓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에서 구할 수 있는 모든 재료로 술을 빚었습니다.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먹거리로 술을 빚었기 때문에 지역마다 술의 재료가 달랐고, 조금씩 다른 기후와 생활의 차이 때문에 지역마다 피울 수 있는 누룩 곰팡이가 달랐습니다. 문헌으로 알려진 것만 해도 600여 가지나 되는 갖가지 술들을 빚을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자연을 그대로 생활에 녹여내었던 우리 선조들의 지혜 덕이었습니다.
우리 술의 다양성과 문화는 주세령이라는 이름으로 탄압이 자행되었던 일제시대와, 먹을 곡식조차 넉넉하지 못했던 생활살이, 급속한 산업화를 겪어오면서 모두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백미 1말 1승을 백세 작말하여 더운 물 3말에 죽 쑤어 누룩가루 1되 반과 섞어 3일만에 백미 2말 백세 작말하여 익게 찌고 진말(밀가루) 3홉을 좋은 술에 불린 다음 넣고서 봉하여 14일만에 쓴다.
<술 만드는 법(酒作法)>이라는 작자 미상의 1800년도 한글 필사본으로부터 사시통음주의 복원이 시작됐습니다. 사시통음주는 사시사철 빚어 마실 수 있고, 사시사철 보관이 가능하며, 통음(通飮)하여 즐길 수 있었던 술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통음’은 통할 통(通), 마실 음(飮)을 쓰는 단어이며, 단순히 취하기 위해 마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사람들, 손님과 마음을 통하며 술을 즐긴다는 선조들의 풍류를 보여주는 면모이기도 하지요.
우리 술 전문가들이 모여 문헌에 따라 술을 빚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빚어져 나온 술은 산도가 너무 높았고, 알코올 도수도 다른 약주보다 높았습니다. 문헌의 내용을 지키지 않은 것이 있나 해서 문헌을 읽어 내려간 횟수만 수백 번이고, 발효 과정을 살피고 또 살폈습니다. 같은 일을 수십 번 반복한 후에야 ‘사시사철 빚을 수 있고, 오래 두고 마실 수 있는’ 향기로운 사시통음주가 탄생했습니다.
1516년 맥주순수령에 입각해 만드는 미국 크래프트 맥주,
고든 비어쉬(Gordon Biersch)
|왼쪽부터 고든 비어쉬 헤페바이젠, 고든 비어쉬 필스너, 고든 비어쉬 블론드 복
크래프트 맥주는 장인정신이 깃들어 있는 맥주, 품질과 풍미에 중점을 주어 양조한 맥주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크래프트 브루어리라는 용어는 70년대 말, 80년대 초 미국에서 소규모 양조자들이 활발히 창업활동을 시작할 무렵 만들어졌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하우스 맥주를 만들어 파는 마이크로 브루어리나 브루 펍이 유행하며 각광받고 있지요.
각국의 크래프트 맥주 생산자들은 보리와 물, 호프 외에 다양한 재료를 사용해 독특한 맛을 내기도 합니다. 북유럽의 괴짜 생산자 미켈러는 보리 맥아에 오트밀과 루왁 커피를 넣어 마치 아침식사에 곁들여 마시는 커피 향과 같은 맥주를 만들어 주목을 받기도 했습니다.
|왼쪽부터 고든 비어쉬 골든엑스포트, 고든 비어쉬 페일에일, 고든 비어쉬 마르젠
반면, 1988년부터 캘리포니아에서 맥주를 만들고 있는 ‘고든 비어쉬’라는 양조장은 이런 트렌드와는 반대로 독일의 맥주 순수령에 입각한 맥주를 완벽하게 만들어내는 것으로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맥주 순수령은 맥주를 만들 때 반드시 몰트로 만든 보리와 물, 호프만을 사용하도록 규정한 것으로 1516년 빌헬름 4세가 제정, 공표해 독일 맥주 양조 역사 상 가장 큰 획을 그은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고든 비어쉬의 여섯 가지 맥주는 맥주는 마치 유럽 정통 맥주처럼 물과 보리 맥아, 홉, 효모 외에는 어떤 인위적인 재료도 사용하지 않으며, 부드러운 기포 역시 양조과정에서 자연적으로 만들어지게 합니다. 보리 맥아는 독일, 캐나다에서 들여오고 있으며 바바리안 홉과 효모는 독일 것을 사용합니다.
독특한 재료나 신기한 양조법은 아니지만, 엄선된 최상급 재료를 사용해 철저하게 장인정신으로 전통적인 맥주를 만든다는 점에서 ‘크래프트 맥주’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