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읽다가 알 수 없는 두려움과 답답함에 무척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바로 이런 문장들이 등장하면서부터다.
“어떤 고함이, 울부짖음이 겹겹이 뭉쳐져, 거기 박혀 있어. 고기 때문이야. 너무 많은 고기를 먹었어. 그 목숨들이 고스란히 그 자리에 걸려 있는 거야. 틀림없어. 피와 살은 모두 소화돼 몸 구석구석으로 흩어지고, 찌꺼기는 배설됐지만, 목숨들만은 끈질기게 명치에 달라붙어 있는 거야. 한 번만, 단 한 번만 크게 소리치고 싶어. 캄캄한 창밖으로 달려나가고 싶어. 그러면 이 덩어리가 몸 밖으로 뛰쳐나갈까. 그럴 수 있을까.”
어느 날부터 육식을 거부하며 가족들과 갈등을 빚기 시작하는 주인공. 그런 주인공을 이해하지 못하고 강제로 고기를 먹이려는 가족들. 소설 속 사람들은 기괴했고 잘 이해되지 않았다.
곧 직업병이 발동했다. 나의 머릿속에선 자꾸 요리사 다운 상상력이 스멀거렸다. 우선 주인공 영혜가 저러다 굶어 죽지는 않을까 싶어 안타까웠고 두려웠다. 단백질은 육류에서만 섭취할 수 있는 영양소가 아니다. 육식을 하지 않겠다고 했을 때 나라면 ‘채소 버섯 죽’으로 몸의 기력을 회복시킨 후 두부 요리, 콩 샐러드 같은 채식 건강 요리를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던 당시의 기억이다.
‘만약 내가 소설 속 인물이 되어 음식을 해 먹였다면, 영혜는 건강해졌겠지만 노벨문학상은 받지 못했겠지’ 하는 엉뚱한 생각도 해봤다.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에 너무나 기뻤고 벅차올랐다. 그러다 문득 한강 작가와 나를 연결하는 지점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던 기억이다.
사실 나는 『채식주의자』를 읽고 나서 후유증이 있었다. 주인공 영혜 때문에 꽤 오래 아팠다. 누군가가 굶어 죽어가는 이야기를 접하면 나는 그게 그렇게 마음 아프다. 일종의 직업병일 것이다. 평생 음식을 만든 사람으로서 한 가지 소망이 있다면 세상에 굶어 죽는 사람은 더는 없었으면 하는 거다. 골고루 나누기만 한다면 현재 지구 상에서 생산하는 식량은 모두를 살릴 수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어디에선가는 굶어 죽는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살아있는 우리 모두의 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살면 우린 정말 벌 받을 거다.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에서 예외 없이 종교가 힘을 잃어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신이 존재한다면 우린 분명 아주 큰 벌을 받아야 할 테니 말이다. 차라리 신이 없는 세상이 훨씬 마음 편하겠지, 불의를 외면하기에도 좋고.
호텔 주방에서 근무하다 보면 채식을 요구하는 고객의 주문을 받을 때가 있다. 그때는 어떤 채식주의인지 정확하게 파악한 후에 음식을 준비해야 실수가 없다. 채식주의자(Vegetarian)는 건강, 종교적 신념 등 다양한 이유로 채식을 선택한 사람들을 일컫는다. 이들은 고기나 생선을 제외한 채소와 곡물만 섭취한다. 베지테리언은 먹는 음식에 따라 몇 개의 그룹으로 나뉜다. 우선 고기와 생선, 계란, 우유, 벌꿀까지 일체의 동물성 식품을 섭취하지 않고 과일과 채소만 먹는 완전한 채식주의자인 비건(Vegan)이 대표적이다. 한편 락토(Lacto)는 과일, 채소, 우유와 유제품까지 섭취한다. 락토-오보(Lacto-Ovo)는 여기에 계란까지 섭취한다.
페스코(Pesco)와 폴로(Pollo)를 잘 구분해야 하는데, 종종 헷갈리기 때문이다. 페스코는 적색육과 백색육(닭 등 가금류)을 먹지 않고 어패류는 먹는다. 폴로는 적색육과 어패류를 먹지 않는 대신 백색육은 섭취한다. 특이하게 보이지만 이들은 대개 환경주의자들이다. 가금류는 식량 생산 과정에서 환경을 덜 파괴한다는 논리다. 플렉시테리언(Flexitarian)은 평소에는 채식을 하지만 경우에 따라 육식도 하는 간헐적인 채식주의자를 말한다.
가장 극단적인 채식주의로는 프루테리언(Fruitarian)이 있다. ‘과식주의자’라고도 하는데, 이들은 식물에 해가 되지 않는 부분인 과일, 씨앗, 곡식만 섭취한다.
소설 『채식주의자』의 주인공 영혜의 채식주의 성향을 굳이 분석해보면 그녀는 프루테리언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영양학 차원에서 보면 권장할만한 선택은 아니다. 위험하다.
소설 속 영혜를 보면서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그녀를 둘러싼 가족의 태도다. 그 누구도 영혜를 존중하지 않는다. 그의 말과 행동의 의미를 보려고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각자 자신만을 위해서 판단하고는 영혜를 폭력적으로 대한다.
음식과 먹는다는 행위는 우리의 몸을 살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누구와 함께 먹고 어떤 추억을 쌓느냐에 따라 음식은 한 사람의 인생 전체에 엄청난 영향을 주기도 한다.
몇 해 전, 방송국에 근무하는 후배가 그날 하루 너무 힘들었다면서 퇴근길에 우리 호텔 홍연에서 짬뽕을 먹고 싶다고 했다. 나는 무조건 오라고 했고,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지친 이에게 한 끼의 식사를 내어 주는 것만큼 위대한 일은 없다’ 이 말은 몇 해 전 돌아가신 어머니가 나에게 해준 말이다. 젊을 때는 이게 무슨 말인지 잘 몰랐다. 이제야 조금씩 이해가 간다. 후루룩 소리를 내며 맛있게 먹는 후배를 보니 형언하기 어려운 흐뭇함이 느껴졌다.
요즘 가족 모임을 위한 장소와 메뉴 상담을 자주 해 주고 있다. 내가 근무하는 조선 팰리스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마친 고객들이 주는 피드백은 날 정말 행복하게 한다.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주고 나서 내가 얻는 이런 행복은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기쁨을 준다.
요즘 MZ세대들 사이에 ‘텍스트 힙(Text Hip)’이라는 트렌드가 생겼다고 한다. 독서가 멋진 일이라는 인식이 생긴 것이다. 힙한 젊은이들이 자신의 독서 경험과 기록을 사진과 함께 SNS상에 공유한다니 멋지다. 이런 문화에는 나도 참여하고 싶다. 조선 팰리스 레스토랑에 오면 요리 사진을 찍는 분들이 많다. 우리 요리는 맛도 최고지만 플레이팅이 아름답기로도 유명하기 때문이다. ‘각각의 메뉴에 가장 어울리는 표지 디자인의 책을 비치해 두고, 고객들이 요리와 책이 함께 어우러진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잠시 해보기도 했다.
최근 가와시로 사키 작가의 소설 『전남친 최애음식 매장위원회』(놀)을 읽었다. 일본에서 폭발적인 인기가 있었다는 후문도 있었고, 무엇보다 재미난 책 제목에 끌렸다.
골목에 위치한 작은 찻집 ‘비긋다’를 배경으로, ‘전남친 최애음식 매장위원회’를 찾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때로는 누군가를 잊기 위해서, 때로는 누군가를 오래 기억하기 위해서, 이곳을 찾는 손님들은 다양한 이유로 추억의 요리를 다시 맛보고 싶어 한다. 이곳을 지키는 주인공 모모코, 구로다, 아마미야는 정성이 가득 담긴 한 끼의 요리를 내놓으며 사람들의 마음을 다정하게 위로한다. 실패한 사랑과 슬픈 기억들이 담긴 음식을 함께 나누며 감정을 정리하고, 이별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면서 소설 속 사람들은 다시 시작할 위로와 용기를 얻는다.
동의한다. 나도 똑같이 생각한다. 요리를 완성시키는 것은 요리사가 아니라 그것을 먹는 손님이라는 것 말이다. 먹는 사람의 기억과 마음이 들어가야 요리는 완성된다는 것을 새삼 떠올리며 나는 오늘도 호텔 주방의 냄비 속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소스에게 귀를 기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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