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식,미식,편식:정동현의 三食일기] 과일의 황제, 멜론

2016/05/10

“수박은 과일의 왕이다.”

<허클베리 핀>을 쓴 마크 트웨인의 말이다. 전후 맥락은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압도적인 크기와 흘러넘치는 과즙을 보며 ‘왕’이란 단어를 떠올렸으리라. 나는 여기에 한 마디 덧붙이고 싶다.

“멜론은 과일의 황제다.”

호주의 한국인 요리사, 멜론에 눈뜨다

나는 중산층을 밑도는 가정 경제 환경에서 자랐기에 멜론은 머나먼 과일이었다. 백화점 코너 한켠에 있는 멜론을 볼 때면 ‘누가 저걸 사 먹을까?’ 생각하며 멜론 아이스크림을 사먹곤 했다. 그러다 나이가 들고 요리를 하게 되면서 나는 멜론과 친해졌다. 그곳은 호주, 호텔의 조식 뷔페였다.

남반구에서 가장 큰 카지노라는 멜버른 크라운 호텔의 조식 뷔페 준비는 새벽 4시부터였다. 새벽 4시, 제대 이후 그 시간에 눈을 떠 본 적은 처음이었다. 호텔로 가는 번화한 길에는 거나하게 취한 객들만 돌아다닐 뿐이었다. 성스러운 노동으로 향하는 길. 나는 아무도 눈 뜨지 않은 새벽 거리를 혼자 걸을 때면 신성한 노동에 대한 찬양이 절로 나왔다, 는 거짓말이고 절로 욕이 나왔다. 현지에 가면 가장 빨리 배우는 것이 욕이라 했던가? 내가 아는 영어 욕 레퍼토리를 다 써갈 때 쯤이면 아직 불이 켜지지 않은 주방에 도착했다.

“나마스떼.”

“굳모닝.”

나의 인도말 인사를 영어로 받는 인도 요리사 ‘라지’. 나보다 살짝 어두운 피부색에 투박한 손. 나를 보며 씩 웃는데 ‘아서라 정든다’는 말은 못 하고 씩 웃으며 가방에서 칼을 꺼냈다. 다른 요리사들과 웨이터들도 하나 둘 도착. 그 중 태반이 인도 친구들이었다. 이 부분에서 사정 설명을 해야 할 것 같다. 호주에 왜 인도 요리사인가? 호주에서 힘든 일은 인도, 파키스탄, 스리랑카, 그리고 한국 사람들이 도맡아 한다. 덕분에 힘들고 임금이 싼 접시닦이와 요리사 일은 이 다국적 군단 차지다. 그 중에서도 새벽에 나오는 조식 담당 요리사들 면면을 보면 이곳이 호주의 별 다섯 달린 호텔인지, 아니면 델리 어디쯤의 인도 레스토랑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요리사 출신 성분이 어떻든 맛만 제대로 나오면 상관 없는 것. 나는 전혀 이해가 안 되는, 아침 일찍 나는 새들, 얼리 버드를 위해 아침 준비를 시작했다. 내가 맡은 것은 과일 준비였다.

 

“얘야, 과일 좀 깎아오너라.”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 1단계, 과일깎기. 사과 몇 개 깎는다면야 일도 아닌 것. 그러나 여기는 호텔 조식 뷔페. 세상이 좋아져서 깎아놓은 과일도 많이 판다는데 이 품격 있는 레스토랑에서는 아니될 말이었다. 나는 냉장 창고에서 과일 한 무더기를 가지고 와 큰 칼로 깎고 썰기 시작했다. 그 과일 중 내가 제일 싫어했던 것은 수박. 호주산 수박은 어찌나 덩치가 큰지. 호주 토박이들을 닮은 그 큰 덩치들 껍질을 벗기고 토막을 내다보면 진이 절로 빠졌다. 그렇다면 내가 좋아한 과일은 무엇일까? 당연히 멜론이었다.

과일의 황제, 멜론의 맛

 

떡을 만들면 떡고물을 먹듯 과일을 담당하면 과일을 많이 먹게 된다. 과일은 몸에 좋다며 나는 억지로, 는 아니고 틈날 때마다 과일 조각을 입에 집어 넣었다. 과일 좀 깎고 먹어본 사람으로서 맛 평을 해보자면 이렇다. 먼저 나를 고생시킨 수박의 맛은 솔직하다. 큰 덩치만큼이나 수박의 맛에는 감춤이 없고 풍만하기 그지 없다. 빨간 속살을 보면 선정적일 것 같지만 맛은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아이 같은 느낌이다. 수박을 묘사할 때 괜히 아이들이 수박 한 조각을 물고 있는 정경을 그리는 게 아닌 듯 싶다. 아침 점심 저녁으로 먹으면 의사를 만나지 않아도 된다는 사과는 어떤 맛일까?

푸른기가 도는 사과는 젊은 남자 같다. 아삭 부서지는 경쾌한 식감과 단단한 육질은 젊음 그 자체. 많이 먹고 크게 웃을 것만 같다. 소설이자 애니메이션인 ‘빨간 머리 앤’에서 앤의 남자친구 길버트가 사과 과수원을 하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반면 케이크 장식으로 자주 올라가는 빨간 딸기는 젊은 여자의 웃음처럼 생그럽다. 당도가 아주 높지는 않지만 무르지 않은 육질과 지워지지 않는 산도는 나를 들뜨게 한다. 딸기는 산딸기… 말을 말자. 제사상에 올라가는 황토색 배는 어떨까? 배는 멋지게 수트를 차려입은 사십 대 남자 같다. 일단 밀도가 높다. 단단하고 치밀하다. 맛을 보면 공격적으로 치고 돌어오는 기운은 없다. 그렇지만 오래 여운이 남는다. 멜론은 몽환적이다. 저항감 없이 이가 쑥 들어가는 식감, 나른한 단맛, 멜론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파스텔 톤의 몽롱하고 화사하며 은은한 맛. 그 초현실적인 감각 덕분에 멜론을 먹다보면 내가 서울에 있는지 도쿄에 있는지 파리에 있는지 알 수 없다. 밤인지 낮인지도 알 수 없다. 그저 멜론을 먹는 순간만 있다.

멜론에 가장 열광하는 나라가 일본이라는 것은 그런 면에서 의미심장하다. 일본의 멜론 사랑은 여러모로 유별난 구석이 있다. 소보로빵의 다른 이름이 멜론빵인 것은 일본인이 가진 멜론 사랑의 한 단면이다. 멜론음료, 멜론 아이스크림 등, 멜론이 들어가지 않은 종류를 찾기가 힘들고, 인기가 없는 것 역시 찾기 힘들다. 5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일본에서는 참외를 먹었으나 멜론이 도입된 이후 참외가 거의 사라져버린 역사를 생각하면 일본의 멜론 사랑은 가히 전면적이다. 그러나 그 나라 사람들이 가진 애착을 보려면 가장 얼마나 비싼 값을 치르는지 보면 되는 일. 일본 훗카이도 도청 소재지 유바리 산 멜론 한 통이 1300만원에 팔린 기록이 있을 정도니 일본의 멜론 사랑은 세계 최고라 할만 하다. 다른 과일 역시 일본에서는 좋은 품질이라면 깜짝 놀랄 정도의 값을 받지만 멜론 수준은 아니다. 현재 후지산 인근 히즈오카 현에서 나는 최고급 멜론의 경우 백화점에서 30만원 정도 되는 값에 팔린다. 그리고 고급 스시 레스토랑의 디저트는 백이면 백, 멜론이다. 그 가치는 일본 특유의 장인정신, 혹은 집착에서 나온다. 비닐 하우스가 아닌 유리 온실에서 기르는 것은 기본이다. 꽃이 피기까지 정확히 50일, 그리고 그 이후 50일을 키운 후 정확히 수확한다. 질을 위해 한 그루에서 하나의 멜론만 수확하는 맹목은 같은 이유로 포도나무 한 그루에서 한 송이의 포도만 수확한다는 프랑스의 그랑크뤼 디저트 와인, 샤또 디켐에 비할만 하다.

멜론 최고의 짝궁, 하몬(jamon)

이런 고급 멜론은 일본에서 디저트로 먹듯 그 자체로도 충분히 맛있다. 하지만 좋은 짝이 있으면 더 빛을 발하는 법. 스페인 산 생햄 하몬(jamon)과 멜론의 궁합은 그 어떤 미사여구로도 충분하지 않다. 스페인의 이베리코 돼지 뒷다리를 2주간 소금에 절였다가 6개월 정도 천장에 매달아 숙성시켜 만드는 생햄 하몬은 짭짤한 소금의 맛과 숙성된 돼지고기의 감칠맛, 무엇보다 숙성된 꼬릿한 냄새 뒤로 스페인의 들녘 공기를 마시는 듯한 묘한 상쾌함이 깃든다. 그 하몬을 노란 멜론과 함께 입안에 넣으면 ‘아’ 하는 탄성과 함께 녹아내린다. 단맛과 짠맛은 서로를 탐하듯 입 안에서 뒤섞인다. 멜론과 하몬의 섬세하고 고급스러운 향기는 내 몸에 스며들어 나를 여기가 아닌 어디로 이끈다.

아마 이국에서 내가 멜론의 맛을 알게 된 것과 일본의 6~70년대 고도 성장기 시절, 일본인이 멜론에 급격히 빠져들게 된 것은 멜론의 맛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북아프리카 원산인 멜론의 퇴폐적이기까지 한 집요한 단맛과 나른한 향은 고된 현실을 잠시 잊게 만든다. 그리고 꿈을 꾼다. 그 꿈은 어느 한군데 막힘 없이 매끄럽고 부드러우며 촉촉하고 달콤하다. 그 꿈이 끝나고나면 다시 고된 나날이 기다리고 있을테지만 그 순간만은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다. 그 꿈은, 맛있다라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멜론의 맛이다.

* 한국에서 제일 비싸고 제일 맛있는 멜론은 SSG 마켓에 판다. 먹어보고 하는 소리니 믿어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