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이중섭의 예술 세계

2016/08/11

  <흰 소>, 1955, 종이에 유채, 29×41cm, 홍익대학교박물관 소장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의 한 대목입니다. 실종된 엄마를 찾아 헤매는 자식들에게 어느 날 제보가 옵니다. 예전에 살던 동네 약국의 약사가 엄마를 봤다는 거였어요. 자식들이 실종 전단지를 들고 찾아갔더니 약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분 맞아요. 눈이 똑같았소. 내가 어려서 소몰이를 해봐서 이 눈을 많이 봤소. 어떤 모습을 하고 있거나 눈이 똑같은데 왜 몰라본단 말이오?” 소와 똑같은 눈을 가진 엄마. 소몰이꾼이 본 소의 눈과 엄마의 눈은 하나였습니다. 어떤 모습을 하고 있건 눈은 똑같다고 이야기하지요. 틀림없이 한없이 선량하고 티 없이 맑은, 그렁그렁한 눈동자였을 겁니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제 머릿속에 불현 듯 떠오른 그림 한 점. 이중섭의 <황소>입니다.

 

 <황소>, 1953~54, 종이에 유채, 32.3×49.5cm, 개인소장

소의 눈동자를 한 번 보세요. 소설 속에 나오는 바로 그 눈입니다. 우직하고도 선한 소의 품성이 저 커다란 눈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합니다. 긴긴 인고의 세월을 견뎌낸 듯 얼굴엔 굵은 선으로 거침없이 그어 내린 주름이 가득하지만, 그럼에도 저 눈동자만큼은 정말 강렬하게 우리의 시선을 잡아끌지요. 여기서 우린 깨닫게 됩니다. 소의 눈은 곧 엄마의 눈, 이 나라 백성의 눈이자 우리 민족의 성정을 상징하는 눈이라는 것을요.

아시다시피 이중섭 하면 뭐니 뭐니 해도 소 그림입니다. 생전에 소를 얼마나 좋아했던지 한때 소에 미쳐 살았다는 증언이 제법 남아 있지요. 이른 아침에 나가서 밤에 들어왔는데 스케치북을 보면 소의 몸통과 머리, 발, 꼬리 등이 그려져 있었다고도 하고, 어떤 날은 스케치북이 깨끗해서 알고 보니 소 관찰하느라 하루를 다 보냈다고도 하고, 남의 집 소를 뚫어지게 관찰하다 그만 소도둑으로 몰려 잡혀간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황소>, 1953~54, 종이에 유채, 29×41.5cm, 개인소장

화가 이중섭에게 소는 한국적 서정과 향토색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소재였습니다. 이중섭은 그래서 치열한 관찰과 사생을 통해 한국적 미감과 정서가 듬뿍 담긴 위대한 소 그림들을 남겼습니다. 소를 빼놓고는 이중섭의 예술을 설명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말이지요. 붉은 바탕에 울부짖은 황소를 그린 이중섭의 작품은 모두 세 점입니다.

이 가운데 두 점이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진행되고 있는 <이중섭, 백년의 신화> 전시회에 출품됐는데요. 위의 작품은 그 중에서도 단연 눈길을 끕니다. 일반에 최초로 공개되는 작품인데다, 특이하게도 액자가 이중으로 돼 있기 때문이에요. 원래 작품을 액자로 만든 장본인이 바로 이중섭 화백이었다고 해서, 그 액자를 그대로 또 다른 액자에 끼운 겁니다. 지금껏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참으로 진기한 이중액자 작품인 셈이지요.

<황소>, 1953년경, 종이에 유채, 35.5×52cm, 서울미술관 소장

2010년 6월, 이중섭의 소 그림 가운데 대표작으로 꼽히는 <황소>가 경매에 나와 엄청난 화제가 됐습니다. 작품이야 두말 할 것도 없고, 60여 년 세월에도 최상급으로 평가될 만큼 보존 상태까지 좋아서 경매 최고가를 경신할 거란 기대감이 컸기 때문이지요. 당시 최고가 기록은 2007년 박수근 화백의 <빨래터>가 세운 45억 2천만 원이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최종 낙찰가는 예상을 크게 밑도는 35억 6천만 원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물론 이 역시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지만요. 그렇다면 도대체 이중섭의 <황소>는 누가 가져갔을까요. 지난 4월, 아주 우연한 기회에 사석에서 <황소>를 낙찰 받은 소장자를 직접 만날 수 있었습니다. 주인공은 바로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있는 서울미술관의 설립자 안병광 회장입니다.

 서울미술관 전경

안 회장이 <황소>를 손에 넣게 된 데는 실로 운명적이라고 밖에 표현할 길 없는 극적인 사연이 있습니다. 제약회사 말단 영업사원 시절이던 1983년, 시내에서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피해 액자가게 처마 밑에 서 있다가 우연찮게 황소 그림을 보고 묘한 끌림을 받았다는 군요. 7000원을 주고 덥석 그림을 샀답니다. 진짜 그림이 아니라 사진이었지만요. 그 그림이 저 유명한 이중섭의 <황소>라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고 해요. 그때부터 안 회장에게 <황소>는 꿈이자 로망이 됐습니다. 그렇게 30년 세월이 흘러 어느 날 드디어 기회가 찾아오지요. 2010년에 황소가 경매에 나온 겁니다. 문제는 어마어마한 그림 값이었어요. 너무나 갖고 싶은데, 돈이 문제였던 거지요. 안 회장은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이중섭의 다른 작품 <길 떠나는 가족>을 내놓고 나머지 차액만 지불하기로 하면서 그토록 원했던 <황소>를 마침내 품게 됩니다.

<길 떠나는 가족>, 1954, 종이에 유채, 29.5×64.5cm, 개인소장

<길 떠나는 가족>은 1955년 서울 미도파 화랑에서 열린 이중섭의 전시회에 출품된 그림입니다. 당시에 어떤 분이 쌀 한 가마니를 주고 그림을 사갔다고 해요. 그런데 나중에 그림이 팔렸음을 알게 된 이중섭 화백이 구매자를 찾아가서 돌려달라고 통사정을 했다고 합니다. 이 그림은 일본으로 떠난 아내와 아이들 주려고 그린 거라 팔 수 없다고 말이에요. 대신 다른 그림을 주겠다고 해서 맞바꾼 그림이 바로 <황소>였습니다. 55년이란 긴 시간이 지나 2010년 <황소>가 드디어 경매에 나왔어요. 출품자는 바로 이중섭과 그림을 맞바꾼 바로 그 소장자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안 회장이 그림 값의 일부로 내놓은 <길 떠나는 가족>은 결국 55년 전에 쌀 한 가마니를 주고 그림을 구입한 첫 주인에게 갑니다. 한 편의 드라마와도 같은 참으로 기막힌 인연이지요. 이런 사연을 알고 나면 같은 그림도 사뭇 달리 보일 겁니다. 운 좋게도 두 작품 모두 이번 이중섭 전시회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도원(낙원의 가족)>, 1950년대, 은지에 새김, 유채, 8.3×15.4cm, 뉴욕현대미술관 소장

종이로 만들어진 담배 겉포장을 벗겨내면 은빛으로 반짝거리는 ‘은지’가 나오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부르기 좋은 대로 담배딱지, 은종이, 은지 등으로 불렸지요. 그런데 여기에 그림을 그려보자는 기상천외한 발상을 품은 화가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중섭입니다. 담뱃값을 뜯어서 속지를 떼어내 반반하게 편 뒤에 송곳으로, 주머니칼로, 골펜으로 그 작은 바탕에 무한한 세계와 형상들을 긁고 파내 완성한 은지화. 이중섭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는 이중섭만의 독보적인 그림 재료였던 은지화는 이중섭이 남긴 가장 위대한 업적의 하나로 꼽힙니다. 은지화는 1951년 제주 시절부터 1952년 부산 시절까지 주로 그려졌다고 하는데요. 지금 남아 있는 이중섭의 은지화는 최소 120점에서 최대 300점에 이르는 걸로 추정됩니다.

<신문을 보는 사람들>, 1950년대, 은지에 새김, 유채, 10.1×15cm, 뉴욕현대미술관 소장

은지화 속 세상은 참으로 다채롭습니다. 이중섭이 평생에 걸쳐 그리고 또 그린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부터 가족의 행복하고 단란한 일상은 물론 화가 자신을 그려 넣은 것도 있지요. <이중섭 평전>의 저자인 미술사학자 최열 선생은 그 중 대표작으로 <도원> 연작을 꼽았습니다. 위의 작품을 한 번 보실까요. 복숭아가 주렁주렁 탐스럽게 열린 나무를 화면에 빼곡하게 그려 넣은 작품입니다. 화면 가운데 나비도 날고 비둘기도 나는 이곳은 화가 이중섭이 그토록 꿈꾸던 무릉도원, 다시 말해 이상향이었을 거예요. 오른쪽 아래에 콧수염 난 인물은 영락없이 이중섭 자신이지요. 커다란 복숭아를 그 아래 누워 있는 여인(아내)에게 선물하는 모습이 어쩌면 저리도 다정하고 사랑스러운지요.

<복숭아 밭에서 노니는 아이들>, 1950년대, 은지에 새김, 유채, 8.3×15.4cm, 뉴욕현대미술관 소장

이 귀하디 귀한 보물의 진가를 이중섭 살아생전에 정확하게 꿰뚫어본 외국인이 있었답니다. 당시 미국문화원 외교관이자 서울대학교 강사였던 아더 J. 맥타가트(Arthur J. MacTaggart, 1915~2003)가 1995년 1월 18일에 서울 미도파화랑에서 개막한 이중섭 작품전을 보고 상당히 높은 평가를 했어요. 맥타가트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전시회에 나온 은지화 세 점을 구입해, 이듬해 세계적인 미술관인 뉴욕현대미술관(MoMA)에 기증하게 됩니다. 위에 소개해드린 두 점 외에 아래 <복숭아 밭에서 노니는 아이들>이란 작품까지 해서 이중섭의 은지화 세 점은 20세기 한국인 화가의 작품으로는 유일하게 뉴욕현대미술관에 소장돼 있어 그 가치가 더하지요. 이번 이중섭 전시회에도 세 점이 모두 나왔습니다.


뉴욕현대미술관 소장 은지화의 포장을 푸는 모습 (영상제공: 국립현대미술관)

그토록 귀한 작품이니 미국에서 빌려다가 한국으로 가져오는 과정도 대단히 어려울 수밖에요. 그래서 우리 국립현대미술관이 한국에 들어온 이중섭의 작품 포장을 벗겨내는 낱낱의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처음으로 직접 촬영을 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전시회에 가면 이미 설치된 작품만을 볼 수 있을 뿐이지요. 작품을 가져와서 포장을 벗기고 작품의 상태가 어떤지, 흠은 없는지 확인하는 과정은 공개하지 않거든요. 특히 ‘유물 컨디션 체크’ 과정은 전문가가 직접 점검항목에 일일이 맞춰 유물 상태를 확인하는 절차라서 한 치의 어긋남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해요. 그만큼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고 남다른 정성도 필요하지요. 이번에 국립현대미술관의 도움을 얻어 바로 그 영상을 여러분께 보여드립니다.

 

  왼쪽부터 <아들 태성에게 보낸 편지>, 1954, 종이에 펜, 채색, 26×20.5cm, 개인소장 / <부인에게 보낸 편지>, 1954년 11월, 26.5×21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이중섭 하면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 바로 편지입니다. 1952년 7월 무렵 아내와 자식들을 일본의 처가로 떠나보낸 이중섭에게 편지는 가족과 자신을 이어주는 유일한 끈이었어요. 이곳저곳을 숱하게 전전하는 생활 속에서도 편지 쓰는 일만큼은 거르지 않았지요. 게다가 그 내용은 또 얼마나 절절한지 보는 이를 숙연하게 만들 정도입니다. 전쟁 통에 생이별을 했으니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요. 얼마나 살을 부비고 싶었을까요. 그 시절 이중섭에게는 오직 가족과 그림뿐이었을 겁니다. 이중섭의 편지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 속에 그려진 그림 때문에도 더 값진 보석들입니다. 전시회를 찾은 관람객들이 가장 많이 감동받는 것도 바로 이중섭 화백이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였어요.

이토록 상냥하고 다정한 아버지, 남편이었어요. 타임머신을 타고 60여 년 전으로 돌아갑니다. 거기에 가난했지만 따뜻하고 아름다웠던 화가 이중섭이 있습니다. 편지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모습도 보이네요. 이렇게 이중섭이 남긴 편지를 사이에 두고 우리는 60년 전 화가와 대화를 나눕니다. 그 생생한 목소리를 바로 곁에서 전해 듣는 것만 같지요. 전시장을 찾는 수많은 관람객이 유독 이중섭의 편지를 모아놓은 공간에서 더 오래 머무는 까닭입니다. 얼마 전 서울 부암동 서울미술관에서 이중섭 전시회를 개최했습니다. 전시 제목이 <이중섭은 죽었다>였어요. 이중섭은 죽었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남기고 간 그림과 편지 속에서 이중섭은 살아 있습니다. 우리가 전시회에서 만나게 되는 건 단순히 액자 안에 갇힌 수십 년 전 물감과 붓질의 흔적이 아니라 그 속에서 아직도 살아 숨 쉬는 화가의 삶의 체취와 흔적들이니까요.

(위) 덕수궁관 (아래) 전시장

올해는 이중섭 화백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한 가지 놀라운 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이중섭 전시회를 개최한 것이 처음이라는 사실이지요. 김환기, 박수근과 함께 국민화가로 불리는 이중섭의 전시가 그동안 국립미술관에서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라도 덕수궁미술관의 <이중섭, 백년의 신화> 전은 주목받아 마땅합니다. 출품작만 해도 이중섭 작품이 200여 점이고, 각종 자료가 100여 점입니다.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이중섭의 작품은 이렇게까지 모으는 것부터 쉽지가 않아요.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도 몇 안 되고요. 단언컨대 이만한 규모의 전시는 살아생전에 다시 보기 어렵습니다. 앞으로 50년, 100년이 지나도 그건 마찬가지겠지요. 평일에도 전시를 보기 위해 많은 관람객이 몰리는 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겁니다.

망우리공원에 있는 이중섭의 묘

작년 이맘 때였을 거예요. 답사기로 유명한 유홍준 선생과 함께 서울 중랑구 망우리공원에 있는 이중섭의 묘소를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사진 오른쪽에 있는 조각품은 이중섭이 세상을 떠나고 1년 뒤 친구인 화가 한묵이 쓴 ‘대향이중섭화백묘비’라는 글씨와 후배 조각가 차근호가 새긴 아이 둘의 모습을 담아 세운 겁니다. 망우리공원 답사기 <그와 나 사이를 걷다>의 저자 김영식 선생은 이중섭을 상품 브랜드로 만든 작금의 현실을 개탄하면서 다음과 같이 일갈했습니다. “그들에게 ‘예술은 곧 사기’일 뿐이다. ‘브랜드’ 이중섭이 경매장에서 화려하게 부활할 때 ‘예술가 이중섭’의 망우리공원 묘지는 찾는 이 없어 황량하기만 하다.” 찾아주고 돌보는 이가 있을 때 무덤의 주인은 비로소 재발견되는 것이겠지요. 쓸쓸히 죽어 차디찬 흙 아래 묻혔어도 소중하게 기억하고 호명하는 마음들이 있는 한 이중섭의 예술혼은 변함없이 높고 큰 산으로 우리 곁에 남아 있을 겁니다.

※ 이 글은 미술평론가 최열 선생의 <이중섭 평전>(돌베개, 2014)과 국립현대미술관의 <이중섭, 백년의 신화> 전시 도록에 많은 빚을 지고 있습니다. 특히 작품 이미지와 영상 자료를 기꺼이 제공해주신 국립현대미술관의 호의에 깊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