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기에 앞서 본 이야기는 보다 재미있는 냉면 이야기를 위해 만든 허구임을 밝힙니다.
강남 테헤란로 110번지 우리은행 5층, 504호에는 냉면문화연구소(사)가 있다. 그곳에서는 한국 냉면 문화의 역사 및 진흥 발전에 대한 연구 및 대안 제시를 하는 곳이다. 공채는 하고 있지 않으며, 수시로 채용이 이루어지니 입사를 원한다면 연구소 홈페이지 올라오는 채용공고에 항상 눈과 귀를 열어두어야 한다. 근래 입사한 지인의 말에 따르면, 연구소원의 평균 스팩은 박사급 5명, 석사급 4명으로, 토익은 물론 중국어에 능통한 이도 다수라고 한다. 전공은 제각각인데, 러시아문학부터 국문학, 그리고 경영학 및 컴퓨터 공학 등 그 공통점을 찾기가 매우 힘들었다고 한다. 단지 그들이 공유하는 단 하나의 특성을 든다면 역시 냉면에 대한 사랑일 것이다. 지인이 몇 백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최종면접을 치룰 때, 면접관은 지인에게 ‘당신이 생각하는 한국 최고의 냉면집은 어디인가?’라고 물었다고 한다. 지인은 ‘제 생각에 을지면옥은 옛날의 명성에 기대어 그 맛이 하락중이고, 역시 강호의 최강자는 종로 한복판에 자리한 우래옥이 아닌가 여긴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지인이 답하자마자 면접은 더 이상 진행이 불가능한 혼란속으로 빠져들었는데, 그 이유는 지인의 답에 면접관들 사이에 격한 논쟁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아니, 어떻게 을지면옥의 맛이 하락세란 말인가? 그것에 대한 객관적인 증거를 제시할 수 있는가?”
“김선생, 어찌 맛에 객관적인 증거를 댈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 맛이 떨어짐을 안다는 것은 증거가 필요 없는 일이요, 단지 단 것과 짠 것을 구분할 수 있다면 누구나 아는 것 아니요, 허허 참.”
“박선생, 말씀이 지나치신 것 같구려. 비록 을지면옥을 찾는 이들이 백발성성한 노인들이 대다수라고 하나, 그것이야 말로 을지면옥의 맛이 한결같고 냉면이 추구하는 본질에 가깝다는 증거 아니요?”
“김선생, 노인들의 입맛을 어찌 믿는다는 말이요? 그들의 미각이란 그들이 지나온 세월이 무뎌지고 술 담배 등 각종 유해물질에 감각이 상하여, 면수에도 간장을 타서 먹어야 겨우 그 맛을 느낄 수 있는 수준이지 않소.”
평양냉면 면의 주 재료, 메밀
그때 정선생이 끼어들었다.
“제 생각에 을지면옥이나 우래옥이나 냉면의 대세에서는 멀어졌다고 봅니다. 이제 우래옥에서 일하던 김태원 명인이 봉피양으로 자리를 옮겼으니, 종로의 시대는 가고 이제 강남의 시대가 열린 것이지요. 사대문 냉면 사대천황이니 하던 것들은 이제 옛날 이야기지요.”
그 옆에 있던 조선생이 한 수 거든다.
“장충동에 있는 평양면옥이야 말로, 냉면의 진수이지요. 냉면 한 젓가락을 입 안에 넣고, 육수를 같이 마시면, 메밀꽃 필 무렵의 서정이 입 안에서 펼쳐지니, 그것이야 말로 한국 냉면 문화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최대치의 행복이자, 한국 민속 문화의 깊이 아니겠습니까?”
이때부터 면접관들은 지인의 존재를 잊은 채 싸움… 논쟁을 이어갔다.
메밀향이 나는 거친 면과 맑은 육수의 평양냉면
“마포에 있는 을밀대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씀하시겠소? 살얼음이 낀 육수는 가히 해장 냉면의 최고봉이라고 하는데, 이런 특수적인 상황에서의 냉면의 위치와 효용을 따지자면 냉면집에 대한 판단 기준 자체도 달라져야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냉면 육수에 얼음이 껴서 시간이 갈수록 그 맛이 연해지고, 마치 녹아버린 팥빙수 먹는 느낌이 나거늘, 을밀대의 냉면은 정파도 아니고, 단지 분식집 냉면이 진화한 것에 불과하지요. 얼음이라니, 쯧쯧.”
“시대가 바뀌고 사람들이 입맛이 바뀌고, 거기에 맞춰 발전해나가는 것이 요식업에 종사하는 사람 뿐만 아니라, 현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마땅히 해야 하는 일 아닙니까? 그것을 가지고 분식집 운운하다니요, 을밀대의 역사와 전통을 보세요. 참, 이런 분하고 내가 같이 일하고 있다니!”
고구마 전분의 쫄깃한 면과 새콤달콤한 육수의 함흥냉면
“아니, 그럼 함흥냉면은 어떻게 할겁니까? 제갈공명의 천하삼분지계의 솥을 받치는 세 개의 발 마냥, 오장동을 지배하는 세 곳의 냉면집에 대해서는 왜 아무 말씀이 없으신가요? 이거 너무 편협한 것 아닙니까? 제 생각에는 함흥냉면도 평양냉면에 비해 못할 것 없는 역사와 맛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갑자기 웬 함흥냉면이요? 이 사람 입맛 참 후지네.”
“뭐라고? 아니 그럼 발씻은 물 맛 나는 육수가 좋다고 하는 당신 입맛은 뭔데?”
“발 씻은 물이라니, 그 은은하고 진하며, 깊디 깊은 맛을 그렇게 말해? 이건 나에 대한 모욕이요, 찬란하고 고귀한 기호를 꿋꿋히 지켜가는 천만 냉면인에 대한 모욕이야!”
그 말과 동시에 책상 위로 러시아문학을 전공한 박사가 올라가고, 국문학 박사의 구두가 날아다녔으며, 변호사 자격증이 있는 법학박사는 몇 줌 없는 머리카락이 뽑혔다. 지인은 그 아수라장에서 가까스로 벗어나 참변을 면했다고 한다.
며칠 후 지인에게 합격을 알리는 편지가 도착했는데, 지인이 추측하기로 우래옥을 좋아한 연구원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고. 그 연구원은 지인에게 ‘참으로 강단있고 소신있는 사람’이라며 반겼다고 한다.
냉면의 계절 여름, 더욱 냉면연구소에 할 일이 많아졌다. 냉면이 가장 인기많은 시기에 발맞춰 더욱 연구에 매진하여, 한국 전통 문화 발전에 힘을 쏟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근래에는 웬만하면 함흥냉면이나 비빔냉면은 먹지 않는다고 한다. 이유는 너무 빨개서라나. 냉면이름에 평양이니 함흥이니 이름이 붙어 가뜩이나 의심의 눈길을 사고 있는데, 더 나아가면 안된다며, 시국이 시국이니 만큼, 조심할 것은 조심해야 한다는 취지라고 한다. 나는 ‘하여간 먹물들은 어쩔 수가 없어’라고 생각하며, 오늘도 호기롭게 빨간 냉면을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