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세기도 훨씬 전인 1889년. 5센트짜리 동전을 넣는 세계 최초의 축음기가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한 레스토랑에 등장합니다. 퍼시픽 포노그래프사의 총지배인이었던 루이스 글라스(1845~1924)라는 인물이 개발한 건데요. 동전을 넣으면 기계에서 음악이 흘러나왔습니다. 일종의 음악 자판기였지요. 동전을 넣으면 음악을 들을 수 있다니! 사람들은 이 신기한 장치에 열광합니다. 이름 하여 주크박스(jukebox)의 탄생입니다. 오락기처럼 생긴 기계 안에 레코드판이 들어 있어서 동전을 넣고 단추를 누르면 원하는 노래가 흘러나오는 거예요. 이 위대한 발명품은 <죽기 전에 꼭 알아야 할 세상을 바꾼 발명품>(마로니에북스, 2010)이란 책에도 실려 있습니다. 지금도 할리우드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주크박스가 등장하는 장면을 심심찮게 볼 수 있지요.
주크박스 뮤지컬 시대를 열다, <맘마미아>
뮤지컬 맘마미아 포스터
1999년 영국 웨스트엔드 극장가에서 한 뮤지컬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대단한 화제가 됐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맘마미아>입니다. 국내에서도 장기 공연하며 엄청난 관객을 끌어 모은 작품이지요. <맘마미아>는 뮤지컬의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주크박스 뮤지컬’의 시대를 열었기 때문입니다. 주크박스처럼 대중에게 친숙한 왕년의 명곡들을 들려주는 뮤지컬을 ‘주크박스 뮤지컬’이라 부릅니다. 정확하게 그 효시가 어떤 작품인지를 놓고는 아직도 논란이 분분합니다만, <맘마미아>가 주크박스 뮤지컬 시대를 활짝 열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습니다. 저도 꽤 오래 전에 이태원, 전수경, 홍지민이 출연하는 공연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아바의 최대 히트곡 ‘Dancing Queen’
팝의 역사에 길이 남을 불멸의 4인조 그룹 아바(ABBA)의 히트곡들은 지금 들어도 어찌 그리 좋은지요. 머니 머니 머니(Money, Money, Money), 페르난도(Fernando), 테이크 어 챈스 온 미(Take a Chance on Me), 김미! 김미! 김미! (Gimme! Gimme! Gimme!), 더 위너 테익스 잇 올(The Winner Takes It All), 치키티타(Chiquitita), 댄싱 퀸(Dancing Queen)… 정말 주옥같은 명곡들이지요. 뮤지컬 <맘마미아>는 아바의 노래만 들어도 본전 뽑는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닙니다. 결국 뮤지컬이 아바의 인기를 사들인 거지요. 이게 바로 주크박스 뮤지컬이 가진 강점이자 전략입니다. 이미 검증된 히트곡을 뮤지컬로 새롭게 다시 들려준다! 이런 <맘마미아> 열풍은 영화 제작으로까지 이어져 또 한 번 ‘대박’을 치게 됩니다.
2009년 영국 토니상 시상식에서 선보인 <맘마미아> 하이라이트 장면
다양한 주크박스 뮤지컬의 등장
<맘마미아>가 대성공을 거둔 이후 주크박스 뮤지컬 제작이 봇물을 이루게 됩니다. 비지스(Bee Gees)의 노래로 만든 <토요일 밤의 열기>,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의 명곡으로 가득한 <올슉업>, 포 시즌스(The Four Seasons)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저지 보이스>, 다양한 노래들로 이뤄진 <물랭루즈> 등이 대표적이지요. 주크박스 뮤지컬의 유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해요. 한 가수의 곡만 사용하는 경우를 ‘트리뷰트(Tribute) 뮤지컬’, 여러 가수의 곡을 모은 건 ‘컴필레이션(Compilation) 뮤지컬’이라 부른답니다. <토요일 밤의 열기>, <올슉업>, <저지 보이스>가 트리뷰트 뮤지컬, <물랭루즈>가 컴필레이션 뮤지컬입니다. 양적으로 보면 그래도 역시 한 가수의 노래로 만든 트리뷰트 뮤지컬이 훨씬 더 많습니다. 아무래도 다양한 노래를 섞어찌개 요리하듯 만들려면 그 노래들을 묶어줄 확고한 콘셉트가 필요해서 상대적으로 위험부담이 크기 때문이지요.
뮤지컬 올슉업 포스터
그렇다면 우리나라 창작 뮤지컬 중에는 어떤 작품들이 있을까요? 국내 최초의 주크박스 뮤지컬은 2004년에 등장한 <와이키키 브라더스>입니다. 임순례 감독의 영화를 뮤지컬로 옮긴 이 작품은 7080 세대의 추억을 자극하는 가요와 팝송의 향연이라 할 만합니다. 이후로 <달고나>, <젊음의 행진>, <진짜진짜 좋아해>, <친정엄마>, <광화문 연가> 등이 해마다 꾸준히 만들어지며 관객들을 만나 왔지요. <친정엄마>는 수필집을 영화로 각색한 것을 다시 뮤지컬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고, <광화문 연가>는 가수 이문세가 아니라 이문세 히트곡 제조기로 불린 작곡가 고 이영훈의 노래로 만들었다는 점이 이색적입니다. 특히, 올해는 비슷한 시기에 주목할 만한 창작 뮤지컬 두 편이 나란히 선보여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주목할만한 국내 창작 주크박스 뮤지컬, <페스트> 그리고 <그날들>
서태지 노래로 만든 창작 뮤지컬 <페스트> 포스터
서태지의 노래로 뮤지컬을 만든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엄청난 화제를 모은 창작 뮤지컬 <페스트>가 올 여름 드디어 베일을 벗었습니다. 이 야심만만한 프로젝트는 사실 지난 수년 간 몇 번을 추진하다 엎어지는 과정을 반복하는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서태지의 음악으로 뮤지컬을 만들 수 있을까? 서태지의 노래가 정말 뮤지컬에 잘 어울릴까?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들도 많았어요. 숱한 궁금증과 의구심이 뒤섞인 상황 속에서 뚜껑을 열자 관객들의 반응은 엇갈렸습니다. 서태지의 노래를 원 없이 들을 수 있어서 좋다는 쪽과 서태지의 노래 밖에는 남는 게 없다는 쪽으로 극명하게 갈렸지요. 평가는 각자의 몫일 겁니다. 다만, 1990년대 우리 대중음악계를 평정하며 ‘문화 대통령’으로까지 불린 서태지의 음악을 뮤지컬로 만난다는 사실이 주는 즐거움은 결코 반감되지 않을 겁니다.
서태지가 2009년에 발표한 정규 8집 수록곡 ‘코마’ 뮤직비디오
뮤지컬 <페스트>에 사용된 서태지의 ‘코마’ (화면제공: 스포트라이트)
두 달 간의 대장정에 이어 앙코르 공연까지 마친 <페스트>에 이어 또 하나의 창작 주크박스 뮤지컬이 개막했습니다. 김광석의 노래로 만든 뮤지컬 <그날들>입니다. <그날들>은 2013년 초연, 2015년 재연 이후 국내에서 세 번째로 무대에 오른 창작 뮤지컬이지요. 올해는 마침 김광석의 20주기가 되는 해이기도 해서 각별함을 더해줍니다. <페스트>는 서태지의 음악적 색깔과 묘하게 겹쳐지는 부분이 눈에 띄지만, <그날들>에서 김광석의 체취를 찾기는 어렵습니다. 대체로 잔잔하고 서정적인 분위기를 띤 김광석의 노래와 달리 극의 전개와 무대 구성은 대단히 역동적이고 속도감이 있지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장면에서 김광석의 명곡을 하나하나 감상하는 재미가 남다릅니다. 있는 노래를 중심으로 하되 관객의 흥미를 끌 만한 새로운 요소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주크박스 뮤지컬의 숙명인지도 모릅니다.
뮤지컬 <그날들> 포스터
뮤지컬 <그날들> 뮤직비디오(지창욱의 ‘사랑했지만’)
새롭게 찾아오는 주크박스 뮤지컬, <젊음의 행진> 그리고 <오!캐롤>
뮤지컬 <젊음의 행진> 포스터
올해 주크박스 뮤지컬 대열에 합류하는 두 작품이 더 있습니다. 8090 세대의 취향에 맞춤한 음악과 왕년의 인기 만화 <영심이>를 접목한 창작 뮤지컬 <젊음의 행진>이 11월에 다시 돌아옵니다. 등장하는 노래들의 면면이 정말 화려해요. 김완선의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이승철의 <마지막 콘서트>, 도시의 아이들 <달빛 창가에서>, 유승범의 <질투>, 현진영의 <흐린 기억속의 그대>, 강수지 <보라빛 향기>, 이지연 <바람아 멈추어다오>, 015B의 <이젠 안녕> 등등 중장년층의 향수를 자극할 만한 노래들로 채워진 대표적인 한국형 컴필레이션 뮤지컬이지요. 2007년 초연된 이래 비교적 꾸준히 인기를 끌면서 꾸준한 생명력을 유지해오고 있는 몇 안 되는 뮤지컬입니다.
뮤지컬 <오! 캐롤> 포스터
그리고 또 하나의 화제작이 11월에 옵니다. 혹시 닐 세다카(Neil Sedaka)라는 이름을 기억하시나요? 뭐 이름은 잘 몰라도 노래를 들으면 아, 이거구나 하고 무릎을 탁 치실 겁니다. 영화와 방송, CF에 워낙 많이 사용됐거든요. 유 민 에브리씽 투 미(You Mean Everything To Me), 오! 캐롤(Oh! Carol), 스튜피드 큐피드(Stupid Cupid), 원 웨이 티켓(One Way Ticket) 등 귀에 익은 쟁쟁한 명곡들로 무장한 뮤지컬 <오!캐롤>이 국내에서 초연됩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볼 수 있을 정도로 정말 다양한 주크박스 뮤지컬이 1년 내내 찾아오고 있네요. 기존에 있는 노래를 상품으로 내세운다는 점에서 주크박스 뮤지컬 형식이 조금은 식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불후의 명곡들이 있는 한, 그 노래들을 다시 찾아 듣고픈 이들이 있는 한 주크박스 뮤지컬의 인기는 주~욱 이어지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