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옛 그림 속 독서 풍경(2)

2016/11/22

책 읽기에 푹 빠진 옛 사람들

윤덕희 <책 읽는 여인>, 비단에 담채, 20×14.3cm, 18세기, 서울대박물관 소장

이제 수많은 옛 그림 가운데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독서 그림 두 점을 소개합니다. 위 그림의 주인공은 여성입니다. 그림 속 여인의 모습을 들여다보세요. 손가락으로 행간을 가리키며 독서에 푹 빠진 모습이 보이지요. 얼마나 책을 읽고 싶었을까 하는 그 간절함마저 그림 밖으로 전해져오는 것만 같습니다. <사람 보는 눈>이란 책에 이 그림을 소개한 미술평론가 손철주 선생은 “독서 캠페인에 홍보대사로 내세워도 손색없을 그녀다.”라고 썼습니다. 이 그림을 남긴 화가는 저 유명한 조선 후기 화가 윤두서의 아들인 윤덕희(尹德熙, 1685~1776)라는 문인화가입니다. 제 아무리 풍속화가 만개한 18세기라 해도 당시에 이런 그림이 그려지고 전해졌다는 것 자체가 상당한 놀라움으로 다가옵니다.

독서의 역사를 돌아보면 책을 읽는다는 행위가 여성적인 삶의 형식으로 자리 잡은 것은 불과 300여 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해요. 책 읽는 여성들이 그림 속으로 들어온 것도 18세기부터의 일이랍니다. 오랜 세월 동안 책과 독서는 전적으로 남성들의 전유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에게 책 읽기는 비웃음과 모멸을 감수해야 하는, 때론 정신병자 취급까지 받아야 하는 금지 중의 금기였어요. 그럼에도 ‘그녀들’은 끝끝내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습니다. 여성들이 책을 쓰고 읽는 행위가 아무렇지도 않게 된 오늘날의 시각으로 본다면 뭐 대수롭지 않게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여성들의 독서는 사회적 통념과 편견에 부딪혀가며 자유를 쟁취해간 역사의 산물입니다.

유운홍 <부신독서도>, 비단에 담채, 16.1×22.1cm, 서울대박물관 소장

여기 또 한 점의 독서 그림이 있습니다. 한 젊은이가 등에 땔나무를 가득 실은 지게를 지고 걸으면서 책을 읽고 있군요. 제목을 붙이자면 독서하는 나무꾼입니다. 그저 좋아서 읽는 것일까요, 아니면 입신출세를 목표로 주경야독하는 걸까요. 우리 주인공이 입을 열지 않는 한 정확한 사연이야 알 길이 없겠지만, 걸으면서 책을 읽는 그 뜨거운 열정만큼은 생생하게 전해져 옵니다. 이 작품은 유운홍(劉運弘, 1797∼1859)이라는 화가의 그림인데요. 유운홍은 조선 후기 헌종~철종 연간에 활동한 직업 화가입니다. 이 무렵이 되면 독서하는 장면이 그림에 제법 등장합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단원 김홍도와 현재 심사정 역시 독서와 책에 관한 그림을 남기고 있지요.

(좌) 김홍도 <서당>, 종이에 수묵담채, 27×22.7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우) 김홍도 <과로도기>, 비단에 담채, 134.6×56.6cm, 간송미술관 소장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가운데 서당은 긴 설명이 필요 없는 유명한 그림이지요.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한 번쯤은 보셨을 겁니다. 어린이들의 학교 수업 장면을 그린 걸로는 유일무이한 그림이 아닐까 싶은데요. 하늘 천, 따 지…천자문 외우는 소리가 금방이라도 그림 밖으로 들려올 듯 서당의 수업 장면을 마치 스냅사진처럼 생생하게 담아낸 명작입니다. 오른쪽 역시 김홍도의 그림입니다. 나귀에 거꾸로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신선을 그린 작품이지요. 표암 강세황이 쓴 글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과라는 늙은이 종이 당나귀를 거꾸로 타고, 손에는 한 권 책을 들었는데 눈빛이 글줄 사이로 곧게 쏟아진다.” 그림에 어울리는 멋있는 글귀네요.

심사정 <선유도>, 종이에 담채, 27.3×40cm, 1764년, 개인 소장

이 그림은 조선 남종화의 대가로 불리는 현재 심사정의 <선유도>라는 작품이에요. 배 타고 노는 장면을 그렸는데, 특이하게도 배에 책을 실었습니다. 옛 사람들이 뱃놀이를 할 때 책을 싣기도 했다는 물증이라고 봐도 되겠지요. 성난 파도 위에서 느긋하게 뱃놀이를 즐기는 모습을 통해 험한 세상에서 초연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화가의 처지와 심경을 담은 그림입니다. 잘 알려졌다시피 심사정은 집안이 부정비리에 연루돼 평생 벼슬길이 막혀 불우한 일생을 보낸 분입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덕분에 뛰어난 그림 솜씨를 마음껏 발휘해 조선시대 미술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지요. 책 또한 그 신산한 삶에 좋은 벗이 돼주었을 겁니다.

책이 주인공이 된 ‘책거리 그림’

<책가도 병풍>, 161.7×39.5, 19세기~20세기 초,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책 자체가 주인공이 된 옛 그림도 있습니다. 흔히 책거리 그림이라 부르는데요. 책과 관련된 이런저런 것들을 그렸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여기에 각종 문구류를 같이 그리면 문방도, 책장 형식으로 그리면 책가도가 됩니다. 위 10폭 병풍에는 오로지 책만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조선의 대표적인 문예군주였던 정조의 책거리 사랑은 유별났다고 해요. 보통 옥좌 뒤에는 ‘일월오봉도’라는 그림을 두었는데, 정조는 그 대신 책거리 그림을 두고 자신의 정치 철학을 상징하는 도구로 활용합니다. 이와 관련한 유명한 일화가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에 실려 있는데요. 정조가 어좌 뒤에 서가를 돌아보며 대신들에게 묻습니다. “경들은 보이는가?” “보입니다.” 그러자 정조가 이런 말을 합니다.

“어찌 경들이 진짜 책이라고 생각하는가? 이는 책이 아니라 그림일 뿐이다. 예전에 정자(程子)가 이르길 비록 책을 읽을 수 없다 하더라도 책 있는 방에 들어가 책을 어루만지면 오히려 기분이 좋아진다고 하였다. 나는 이 말의 의미를 이 그림으로 인해서 알게 되었다.”

책거리 그림은 정조 때부터 크게 유행했습니다. 중국 청나라의 궁중 장식화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하지만, 책이 주인공이 되는 이런 형태의 정물화는 중국에도 없고 일본에도 없어요. 오직 조선에만 있는 그림이지요. 정조 때의 문신 남공철의 <금릉집>에 “정조는 화공에게 명하여 책가도를 그리게 하여 자리 뒤에 붙여두시고 업무가 복잡하여 여가가 없을 때는 이 그림을 보며 마음을 책과 노닐게 했다.”는 기록이 전합니다. 정조가 얼마나 책을 좋아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지요. 정조가 그토록 사랑했다던 그때 그 책거리 그림은 지금은 전하지 않지만, 미술사학자들은 국립고궁박물관에 남아 있는 위 그림처럼 책만 가득한 것이 아니었을까 추정하고 있습니다.

장한종 <책가문방도 8곡병>, 종이에 채색, 195.0×361.0cm, 19세기 전반, 경기도박물관 소장

이 그림은 조선 후기 도화서 화원이었던 장한종(張漢宗, 1768∼1815)의 작품입니다. 서가를 가리고 있던 휘장을 걷은 모습을 그린 점이 굉장히 독특하지요. 게다가 여기엔 책뿐만 아니라 온갖 기물들을 함께 그려 넣어 마치 장식장처럼 꾸몄습니다. 그래서 전하는 명칭도 ‘책가문방도’입니다. 보통 왕실용 그림은 누가 그렸는지 흔적을 남기지 않는데, 이 병풍의 가장 왼쪽 여덟 번째 폭의 중간을 자세히 보면 ‘장한종인’이라 새긴 도장을 그려 넣었습니다. 이렇게 은밀하게 화가의 이름을 숨겨놓은 그림이 한 점 더 전하는데요. 이보다 조금 더 후대에 활동한 도화서 화원 이형록(李亨祿, 1808∼?) 역시 화면 왼쪽 여덟 번째 폭 아래에 자기 도장을 슬며시 그려 놓았습니다. 화가들의 재치라고 해야 할까요. 숨은 그림 찾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이형록 <책가도 8곡 연결병풍>, 종이에 채색, 140.2×468.0cm, 19세기 후반,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책거리 그림은 왕실에서 시작돼 민간으로 널리 퍼졌다고 합니다. 대단히 장식적이고 입체적인 사실감이 생생해서 호기심을 한껏 자극했던 거지요. 그래서 지금 전해오는 책거리 그림이 10여 점에 이릅니다. 책거리 그림에는 부국강병을 염원했던 정조의 꿈이 담겨 있기에 더 각별한 의미로 다가옵니다. 책이라는 존재가 언제 이렇게까지 귀한 대접을 받은 적이 있었을까요. 하지만 쌓아두고 읽지 않는다면 책이 아니겠지요. 책은 그 시대가 남긴 지식의 보물창고입니다. 우리는 그 책들을 통해 옛 사람들의 생각을 엿보고 때론 대화를 나눕니다. 책 읽는 행위를 소중하게 여긴 그 마음을 책 그림, 독서 그림에서 만나는 즐거움 또한 남다르고요.

(좌) 이경윤 <고사독서> 종이에 수묵, 26.8×32.5cm, 호림박물관 소장 / (우) 이인상 <송하간서>, 종이에 담채, 28.5×40.7cm, 간송미술관 소장

왼쪽 그림은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왕족 출신 화가 이경윤(李慶胤, 1545∼1611)의 작품이고, 오른쪽은 조선 후기의 유명한 문인 화가 이인상(李麟祥, 1710∼1760)의 작품입니다. 두 작품 모두 야외에서 독서하는 모습을 그렸군요. 경치 좋은 숲을 골라 나무 그늘 아래에 자리를 잡고 앉아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습니다. 계절을 특정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가을 분위기에 딱 어울리는 독서가 아닐까 싶어요. 독서의 계절 가을입니다. 그 유래야 어찌됐든 하늘은 높고 바람 선선하게 부는 이 가을, 어딘가 꾹꾹 묵혀두었던 책장을 다시 펼쳐들고 독서하는 즐거움에 푹 빠져보는 건 어떨까요.

김희겸 <산가독서>, 비단에 담채, 29.5×37.2cm, 간송미술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