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무반에 후임과 나 둘 뿐이었다. 당직 근무를 선 덕에 느닷없는 비상 훈련을 빠지게 된 운 좋은 둘이었다. 그렇다고 불을 키고 책을 보거나 할 수도 없었다. 훈련은 훈련, 모든 내무반에 불을 꺼야 했다. 할 수 있는 것은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 있는 일 밖에 없었다. 때 이른 강제 취침에 잠이 오지 않았다. 멀찍이 누운 후임도 잠이 오지 않는지 뒤척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마치 구남친이라도 된 양 허공을 향해 말했다.
“자냐?”
후임은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아닙니다.”
후임과 할 이야기가 많지는 않았다. 근무를 같이 서지도, 친하지도 않았다. 보통 이럴 땐 남 흉을 보며 이야기를 트기 마련이다. 누가 짠돌이다, 누가 요령을 많이 핀다, 축구를 잘 한다 못한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갑자기 먹는 이야기가 나왔다. 우리는 한창 배고픈 청춘이었다.
“맥도날드 맥플러리!”
“아악! 쿠앤크가 최고지 말입니다.”
“초코파이 보단 몽쉘통통!’
“으악! 초콜릿 함량 자체가 다른 거 아십니까?”
배부른 지금이야 바보 같은 대화이겠지만 그때는 가장 절실한 대화였다. 어차피 연애편지 오는 여자친구도 없었다. 20대 중반, 피 끓는 젊음은 먹는 이야기를 하며 잠 오지 않는 밤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끝말잇기를 하듯 끊임없이 음식 이름이 나왔다. 치킨, 피자, 햄버거, 아이스크림…입대 전 먹고 온 것, 휴가 때 미처 먹고 오지 못한 것 등, 천일야화를 하듯 새벽이 되어도 대화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러다 결정적인 이름 하나가 나왔다.
“귤!”
“아…, 정말 한 박스라도 먹을 자신 있습니다.”
“맞아. 검은 봉다리에 이천원 어치 하는 거 사서 방 바닥에 배 깔고 까 먹으면 정말 맛있는데….”
“아…….”
남는 것은 아련한 신음 소리 뿐이었다. 나는 감귤을 빨리 먹는 것은 늘 자신 있었다. 후임과 이야기한 것처럼 찬 바람 부는 겨울이 되면 배를 깔고 누워 박스에 든 감귤을 까먹으며 텔레비전을 보는 것만큼 재미난 것이 없었다. 감귤은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았다. 온돌에 배를 따뜻하게 지지고 입 안으로 시큼하고 달콤한 귤을 연신 넣는 것은 어린 시절 나의 크나큰 즐거움이었다. 그런 내가 감귤을 따게 되리라곤 생각해보지 않았다. 다 비자(Visa) 때문이었다. 호주에서 내가 가지고 있던 워킹홀리데이비자를 연장하려면 1차 산업에 3달 간 종사해야 했다. 말 그대로 농장을 가든 배를 타든, 광산에 들어가든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와중에 우연히 눈에 띈 것이 감귤 농장이었다. 모집 광고는 흔한 문구로 씌어져 있었다. ‘일은 그다지 힘들지 않다’, ‘돈 많이 번다고 확답을 줄수는 없다.’ ‘그래도 열심히 하면 꽤 번다’ 등등등. 나는 그 문구 하나 보고 남호주의 에들레이드로 떠나는 버스를 잡아 탔다. 10시간 넘게 버스를 타 에들레이드에 도착한 다음 또 버스를 갈아타고 6시간을 달렸다. 그리고 나는 남호주의 소도시 ‘렌마크(Renmark)’에 도착했다.
렌마크는 감귤과 오렌지의 도시였다. 지평선 끝까지 달려도 과수원이 끝나지 않았다. 남호주에 이렇게 큰 과수 단지가 들어선 것은 미국 캘리포니아와의 상관 관계가 작용했다. 호주는 미국 캘리포니아와 적도 반대편에 있다보니 계절 상 수확 시기도 정확히 반대다. 미국 산 오렌지가 나지 않는 시기에 호주 산 오렌지가 나게 되는 것이다(비슷한 이유로 같은 위도에 있는 브라질과 경쟁 관계에 있다). 어찌 되었든 오렌지와 감귤이 어마어마 하게 자라는 이 작은 도시에 일감을 찾아온 한국인, 일본인, 대만인 등은 한철 메뚜기처럼 같이 어울려 살게 된다. 나는 그들 중 하나 였다. 나의 숙소는 스무 명이 함께 사는 큰 집의 이층 침대 아래 쪽이었다. 요리를 계속 하기 위해 찾아온 호주의 사막 한가운데 어딘가, 8인 실 구석에서 나는 첫날을 뜬눈으로 지샜다.
다음날부터 나는 칼이 아니라 작은 니퍼를 손에 쥐고, 가슴에는 앞치마가 아닌 캥거루 백을 맸다. 몇 십 명 씩 부대 단위로 움직이는 이 군단 아닌 군단을 농장과 계약한 수퍼바이저(superviser)가 인솔했고 그날 아침 구역을 배정 받으면 그 부대가 그 구역을 책임지고 수확하는 구조였다. 팀은 2인1조로 짰다. 남자가 사다리를 매고 다니며 나무의 위쪽을 맡고 여자는 나무의 아래쪽을 맡았다. 우리가 주로 딴 것은 감귤이었다. 단위 당 받는 돈이 오렌지 보다 더 했기에 우리 담당 한국인 수퍼바이저는 늘 감귤 쿼터를 따왔다.
감귤 따기는 장난이 아니었다. 내 머릿 속에 있던, 그러니까 영롱이는 햇살 아래 웃으며 수확의 기쁨을 맛보는 아름다운 광경 따위는 없었다. 돈을 벌어야 하니 모두 전의에 불탔다. 처음엔 어리버리 했지만 조금씩 요령이 붙었다. 감귤이라는 놈은 나무 가지 아래 따기 좋게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녀석이 아니었다. 가지 깊숙이 도저히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매달려 있기도 했고 사다리 맨 끝까지 올라가야 손이 닿을 수 있는 곳에 있기도 했다. 따기 어렵다고 따지 않고 넘어갈수도 없었다. 일정 크기 이상은 모두 따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팀과 부대 별로 농장에서 페널티를 받았다. 나뭇가지 사이로 몸을 밀어넣느라 옷이 찢어지고 팔에는 무수한 상처가 났다. 숨도 쉬지 않고 감귤을 따 가슴팍에 매달린 캥거루 백에 넣다 그 백도 다 차면 한 변이 1.5m인 수집 박스에 부었다. 그 박스를 둘이서 세 개 정도는 가득 채워야 하루에 한명 당 150달러를 벌 수 있었다. 얼굴이 까맣게 타고 흙먼지가 하얗게 붙노라면 농사일이 쉬운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와중에 이 감귤 따기도 잘 하는 팀과 못하는 팀이 나뉘었다. 특히 시골에서 일 좀 해봤던 축은 그 속도가 배 가량 차이가 났다. 그 말은 벌이도 배 가량 차이가 났다는 뜻이다. 나는 그때 ‘나도 시골에서 일 좀 해볼 걸’ 하는 생각을 하며 아무리 채워도 가득 차지 않는 플라스틱 박스를 원망스래 쳐다보곤 했다. 그래도 일은 재미있었다. 책상 앞에서 모니터를 보고 있는 것과는 다른, 요리와는 또 다른 정직한 육체 노동의 세계였다. 몸을 얼마나 움직이느냐에 따라 산출물이 달라졌다. 한번 더 움직이고 한번 덜 쉬면 결과물이 달랐다. 자연 속에 일하니 리듬도 자연에 맞춰졌다. 해가 뜨면 일을 시작하고 해가 지면 일이 끝났다. 비가 오면 일을 쉬고 조용히 몸을 뉘었다. 나무에서 바로 따 먹는 감귤 맛도 너무나 남달랐다. 내가 흘린 땀 때문일까? 조금 전까지도 나무로부터 영양분을 받아 자라던 살아있는 존재이기 때문일까? 까맣게 때가 낀 손가락으로 껍질을 뜯듯이 벗겨 그 탱글한 속 알을 입에 넣으면 갓난아기의 꺄르르 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밝고 상쾌한 맛이 온 몸으로 퍼져나갔다. 그 작은 감귤 하나가 살아 있음에 대한 기쁨 같았고 고된 삶 속에서도 언제나 발견할 수 있는 귀중한 행복의 현현(顯現) 같았다.
나는 지금도 찬바람을 뚫고 찾아온 감귤을 보면 남다른 기분이 든다. 감귤을 여전히 좋아하기 때문이 첫째요, 그 작은 한 알을 얻기 위해 흘려야 하는 땀이 얼마인지 아는 것이 둘째 이유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땀을 흘려야만 맛볼 수 있는 그 산뜻한 생(生)의 쾌감이 여전히 생생하기에 감귤 하나에도 나는 쉽게 감격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