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계그룹이 올해부터 대기업 최초로 주 35시간 근무제를 도입했다. 덕분에 업무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나면 오후 다섯시다. 회사 문을 나서 지하철에 들어서면 쉽게 앉을 자리를 찾을 수 있다. 삶의 형태가 바뀐 것이다. 팀의 부제가 ‘2AM’, 팀 주제가로 ‘죽어도 못 보내’를 부르던 시절은 안녕이다. 아침 9시에 업무를 시작해 저녁이라고 부르기엔 부끄러운 오후 5시가 되면 일이 끝난다. 이른바 워라밸은 이렇게 이룩되었다. 정확한 시간에 일이 시작되고 끝난다.
지하철은 바흐의 평균율 연주처럼 규칙적인 리듬으로 역을 통과한다. 직장인이 받는 가장 큰 스트레스는 생활을 통제할 수 없는 것에서 온다고 한다. 자기 삶에 대한 결정권을 가질 때 계획을 세울 수 있다. 그것은 자율이라고 하고 또 다른 말로는 자유라고 한다. 이제 남는 시간에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다른 문제가 생겨난다. 선택의 문제다. 여기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자유에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할 수 있는 자유, 또 다른 하나는 하지 않을 자유다. 어떤 것을 할지 말지 결정해야 한다. 나는 말하고 싶다. 요리할 수 있는 자유를 선택하라.
생존의 필수 기술이었던 요리가 취미 생활이란 범주 안에 들어간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이제 요리는 당당한 취미 생활이고 또 당당한 특기인 시대다. 그 말은 요리 자체에 돈과 시간이 꽤 많이 든다는 이야기다. 한가지 밝힐 사실이 있다. 만약 절약하고 자 한다면 4인 가구 이상이 아니라면 외식을 하는 편이 훨씬 낫다. 비싼 식재료 값, 각종 기구, 수도광열비, 특히 시간을 돈으로 환산한다면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요리를 한다는 말은 구시대적인 발상이다. 대규모로 식재료를 구입하고 대량으로 조리해 단가를 낮춘 즉석식품을 먹는 편이 시간과 돈을 아끼고자 한다면 보다 현명한 선택이다.
그렇다면 요리를 해야 하는 이유가 뭘까? 쉽게 생각해보자 일 년에 몇 안 되는 캠핑과 같은 행사에 솜씨를 발휘할 수도 있다. 물론 일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다는 것이 아쉬운 점이다. 무인도에 떨어진다거나 하는 위급한 상황에서 좋은 기술인 것도 맞다. 역시 이 또한 매우 드문 확률이다. 직업으로서 요리란 기술을 습득한다면 세계 어느 나라에 가서도 직업을 구할 수 있다. 세계 어느 나라에 가서든 하루 12시간 이상의 중노동에 시달리며 그 나라 최저임금에 가까운 급여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 또한 확실하다. 하나하나 따지면 굳이 스스로 요리를 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남이 몰아주는 차가 제일 좋듯 남이 해주는 요리가 제일 맛있다는 말에 수긍이 될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요리는 편리나 이익, 영리 같은 숫자 놀음과 큰 관련이 없다.
불, 요리 그리고 진화의 상관관계를 이야기한 책 요리본능(2011, 리처드 랭엄 지음, 조현욱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
옛날 요리는 생존의 기술이었고 인류가 동물과 다른 존재가 된 전제조건이었다. 하버드 교수 랭엄 박사는 자신의 저서 ‘요리 본능’에서 현재 인류가 존재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요리라고 썼다. 요리함으로써 각종 식재료의 맛과 흡수율이 높아지고 그에 따라 가용 가능한 열량이 늘어나게 되어 뇌 체적 증가로 이어졌다는 설명이다. 현재 각종 신념과 여러 필요 때문에 식재료 그대로 생식을 하는 집단의 경우 시간당 흡수 열량 자체가 요리해서 먹는 쪽에 비교해 현저히 낮으며 그에 따라 성장 장애, 영양결핍, 생리불순, 심지어 불임과 같은 여러 증상을 겪게 된다는 연구 결과도 많다. 거창하지만 요리란 인간이기 위한 하나의 조건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요리는 문화 그 자체이다. 문화가 발전함에 따라 요리에 각국의 기후, 문화, 역사, 경제 상황에 스며들었다. 먹을 것이 부족했던 남부 이탈리아에서는 오래 보관이 가능한 건조 파스타 위주의 단순한 식문화가 발달했고 중앙집권적인 정치 제도를 가졌으며 물산이 풍요로운 프랑스에서는 일찍이 왕족과 귀족들을 중심으로 호화로운 식문화가 탄생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요리로 귀결된다.
요리하며 느끼게 되는 것은 이 인간의 조건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말 자체는 거창하지만, 요리를 하는 순간 나는 제대로 된 인간이 되는 것 같다. 밥을 짓고 나물을 무치며 국을 끓일 때, 그 모든 준비 과정에서 고립된 현대인이 아니라 이 사회와 관계하는 인간임을 느낀다. 만약 밥을 짓는다면 어떤 쌀을 고를지, 그 쌀이 어떤 처리 과정을 거쳤는지, 쌀에 물을 얼마나 불릴지, 화력에 따라 쌀알의 분포에 따라, 기구에 따라, 어떻게 밥맛이 달라지는지 느끼게 된다. 그 과정이 반복되고 학습되면 요리란 행위로 이름 붙여진다. 시금치를 산다. 서양의 시금치와 동양 시금치의 차이에 대해서, 왜 소금물에 데쳐야 싱싱한 초록색이 살아나는가에 대해서, 왜 소금간을 할 때 설탕으로 살짝 밑간을 하는지, 왜 소금에서도 단맛이 나는지, 이런 사실에 대해 알게 된다. 그것이 요리다.
만약 밥 짓기 전문가라면 이보다 더욱 많은 설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쌀의 유래, 품종의 역사, 그리고 한국 농경 정책과 자본의 역할 등, 수많은 이야기가 밥 짓기 하나에 얽혀 있다. 요리를 하려면 장을 봐야 한다. 그때부터 무수한 선택이 기다리고 있다. 어떤 쌀을 살 것인가? 왜 이 쌀이어야 하는가? 그 선택을 하며 사회에 대한 이해가 넓어진다. 쌀이 어떤 가공을 거치고, 그 가공 방법에 있어 어떤 법제가 적용되는지. 그리고 문화적으로 왜 쌀이 우리에게 중요한지, 밥을 중심으로 한 한국인의 식문화는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등 그 끝이 없다. 실제로 요리에 들어가게 되면 또 다른 차원의 설명이 필요하다. 요리는 이제 화학이 된다. 물을 얼만큼 부어야 하고, 어떻게 불 조절을 해야 하는지는 삼투압과 열에너지, 비열 등과 관련이 있다. 어떤 팬이 잘 뜨거워지는가? 왜 팬은 무거워야 하는가? 비열이 높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요리를 하며 배운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 즉 요리를 통해 우리는 사회에 대한 감수성이 높아진다. 김밥을 한 번이라도 싸본 사람은 김밥 원가 운운하며 그 값이 비싸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김밥 하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수작업이 선행되어야 하는지 김밥을 싸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그 과정에 숙련되면 마지막에는 창조의 기쁨을 느낀다.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듯 재료들을 썰고 볶아 새로운 결과물을 만드는 기쁨이 찾아온다. 이윽고 그 결과물을 사람들과 나눌 때는, 먹을 것을 나누는 원초적인 사랑이 탄생한다.
느껴보라. 차가운 물이 손에 닿고 쌀알이 그 물속에서 움직이는 감촉을. 갓 지은 밥의 구수한 향내를. 요리는 귀찮고 해치워야 하는 숙제가 아니다. 인간이 세계와 소통하는 방법이요, 필수적인 과제다. 자신이 먹을 것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자립의 가장 기초다. 바로 주방에 가라. 칼을 들어라. 양파를 잘라라. 불 위에 팬을 올려라. 인간이란 동물로서, 한 사회와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한 남자와 여자로서, 삶의 균형을 지키기 위해, 그 밸런스를 위해, 요리란 무게추를 삶에 올려놓자. 돈과 서류 속에서 존재하는 허깨비 같은 삶이 아니라 칼과 불, 피와 고기, 풀과 나무 속에 존재하는 인간이 되자. 그리고 깨닫게 된다. 행복이란 균형 속에 찾아온다는 것을. 균형이란 행복의 또 다른 이름이란 것을.
신세계프라퍼티 리징 2팀 정동현 셰프
신세계프라퍼티 리징 2팀에서 ‘먹고(FOOD) 마시는(BEVERAGE)’일에 몰두하고 있는 셰프,
오늘도 지구촌의 핫한 먹거리를 맛보면서 혀를 단련 중!
저서로는 <셰프의 빨간 노트>, <그릇을 비우고 나면 많은 것이 그리워졌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