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교 작가의 사진 여행 2화] 베네치아, 물의 도시로 떠나는 여행

2017/01/16

낡은 건물이 촘촘히 들어선 골목을 가득 채운 옥빛 물결. 그 위에 초승달 같은 조각배가 떠 있습니다. 반지르르하게 윤기가 흐르는 검은 조각배는 벨벳 좌석과 금빛 조각물로 장식되어 화려함을 뽐냅니다. 이 이국적 풍광의 사진 한 장은 보는 이의 로망이 됩니다.

물의 도시 베네치아

바다를 가로지르는 긴 제방 위를 건넌 기차는 베네치아의 관문 산타루치아 역에 도착합니다. 짐 꾸러미를 챙기거나 도착 기념사진 찍기에 분주한 관광객이 하나둘 광장을 빠져나갑니다. 그러자 인의 장막에 가려졌던 베네치아의 이국적 풍광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냅니다. 잔잔하게 찰랑거리는 바닷물, 그리고 그 위를 떠다니는 곤돌라와 크고 작은 유람선의 행렬을 보며 드디어 베네치아에 도착했음을 실감합니다.

‘물의 도시’ 베네치아의 교통수단은 배와 여행자의 두 다리뿐입니다.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미로 같은 골목길에서 지도는 무용지물입니다. 결국, 발길 닿는 대로 마음 끌리는 대로 걸음을 옮깁니다. 좁은 수로 위로 곤돌라 행렬이라도 지나갈 때면 가뜩이나 비좁은 골목길이 관광객의 사진 세례에 정체되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이 좁은 수로를 미끄러지듯 떠가는 뱃사공의 노련함과 곤돌라의 우아한 모습이 마냥 신기할 뿐입니다.

베네치아의 골목골목을 연결하는 다리는 운하의 폭에 따라 길이도 높이도 다릅니다. 넓은 운하를 가로지르는 다리에 올라 조망하는 베네치아의 풍광은 사진에서 보았던 아름다움과는 또 다른 느낌입니다. 역시 여행이란 익히 알고 있던 것과 예상치 못했던 낯섦이 결합해 새로운 느낌과 생각을 만드는 과정입니다. 곤돌라, 수상 버스부터 택시, 자가용 보트, 경찰 순시선 그리고 짐을 가득 실은 화물 보트까지 온갖 배들이 끊임없이 오가는 대운하와 그 양편에 가득 자리 잡은 낡은 건물. 한눈에 담기는 베네치아의 풍경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무역선 가득한 중세 해양 도시의 환영인 듯합니다.

베네치아는 6세기경 이민족에게 쫓겨 육지에 발붙일 수 없게 된 피난민들이 바다 위의 작은 섬에 촘촘히 말뚝을 박고 건설한 곳입니다. 베네치아 사람들은 해상무역시대를 맞아 막대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점점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더 많은 사람이 밀려왔고, 더 많은 말뚝을 박아 공간을 확장했습니다. ‘물의 도시’ 베네치아는 이렇게 400여 개의 다리로 120여 개의 섬을 이어 만들어졌습니다.

바다와 맞닿아 있는 베네치아는 유럽 해상무역의 중심이자 지중해의 맹주로 자리 잡았습니다. 큰 상업 도시로 한때는 세속에 찌든 인간들의 온상이란 조롱을 받기도 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도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나왔다 할 수 있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가슴 설레는 ‘물의 도시’ 베네치아. 그 아름다움 이면에는 생존을 위해 거친 파도와 싸우며 도시를 일구어낸 많은 사람의 희생과 인내 그리고 의지가 있습니다.

 


 

베네치아의 아이콘 곤돌라

복잡한 인파를 피해 인적 없는 골목으로 걸음을 옮깁니다. 이따금 낡은 건물 외벽에 부딪히는 물결이 나지막이 찰랑거리며 정적을 깹니다. 허물어진 벽 틈으로 드러난 벽돌과 담벼락에 남아 있는 물 얼룩은 오랜 시간 끊임없이 바닷물에 잠기기를 반복했던 세월의 흔적입니다. 물길에 길이 막혀 발길 돌리기를 여러 번. 발 닿는 대로 길을 옮기는 여행은 수상 쪽마루에 누워 깔깔대며 수다를 떨거나 기념사진을 찍으며 느릿한 시간을 즐기는 소녀들을 만나는 우연한 즐거움도 줍니다. 부드러운 햇살이 피부에 스미는 베네치아의 오후는 나른한 안식의 시간을 선사합니다. 이따금 소리 없이 나타나 골목 모퉁이를 돌아 미끄러지듯 사라지는 곤돌라. 그 위에 몸을 실은 여행객들은 물길 따라 쉬엄쉬엄 흘러가면서 역사를 읽고 추억을 만들고 사랑을 속삭입니다.

곤돌라는 가슴 아픈 베네치아 역사의 산물입니다. 힘이 없던 그 옛날 외적들이 침입해 처녀들을 납치해가는 일이 잦아지자 베네치아 청년들은 분개했습니다. 그리고 약탈당한 여인들을 구출해 오기 위해 소리 없이 빠르게 움직이는 배를 만들었습니다. 그 날렵한 작은 배가 지금의 곤돌라입니다.

낮의 베네치아가 아름다운 자태로 보는 즐거움을 선사한다면 밤의 베네치아는 아름다운 선율로 귀를 자극합니다. 상점들이 문들 닫고 도시에 어둠이 깃들 무렵, 운하 가장자리에 자리한 집집에 켜진 등불이 수면 위로 은은하게 반사됩니다. 어두운 골목 사이로 노를 젓는 뱃사공의 아리아와 아코디언 선율은 골목골목 메아리치며 잔잔하게 가슴을 울립니다.

 


 

베네치아 가면

베네치아의 또 다른 상징은 ‘베네치아 가면’입니다. 기계로 찍어낸 값싼 가면을 판매하는 노점도 곳곳에 있습니다. 하지만 장인들의 꼼꼼한 수작업으로 만든 가면을 전시한 상점 앞을 지날 때면 절로 발길을 멈추게 됩니다. 다양한 재질, 디자인, 색상의 가면들이 각기 다른 개성과 분위기로 묘한 매력을 풍깁니다. 이 독특하고 개성 넘치는 가면은 13세기 초반 십자군 전쟁 후 포로로 끌려온 이슬람 여인의 부르카*에서 유래했습니다. 전쟁이란 정말 많은 것을 파괴하면서도 각기 다른 문화를 뒤섞어 새로운 문화를 탄생시키는 아이러니를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부르카(Burqa)
무슬림 여성이 착용하는 의복. 몸 전체를 가리는 망토형의 겉옷으로 시계를 확보하기 위해 눈 부위는 얇은 천이나 망사로 처리하는 것이 일반적.

그때 그 시절, 매년 1월 말에서 2월에 시작해 사순절에 끝나는 축제에 시민들이 저마다 개성 넘치는 가면과 의상을 착용한 것이 베네치아 가면 축제의 시작입니다. 축제 때면 화려한 가면과 의상으로 자신의 신분을 감춘 시민들에 의해 도시는 자유와 광란의 도가니로 빠져들었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가면은 자신을 감출 수 있는 도구이자 반대로 억눌린 자아에서 벗어나 자신을 표현하는 또 다른 도구, 페르소나였던 것입니다. 사회적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을 생각한다면 ‘사회적 가면에 가려진 또 다른 나를 표현할 수 있는 가면은 어떤 것일까?’ 라는 물음이 떠오릅니다. 이렇게 나를 표현할 수 있는 가면을 살펴가며 걷는 일도 베네치아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입니다.

 


 

리알토 다리를 건너서 산 마르코 광장

리알토 다리와 산 마르코 광장은 베네치아의 모든 길을 연결하는 랜드마크입니다. 대운하를 가로지르는 아치형의 리알토 다리는 오래전부터 베네치아 상권의 중심지이자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다리입니다.

리알토 다리 위에서 탁 트인 베네치아 전경을 감상한 후 다리를 건너 도착한 곳은 산 마르코 광장. 베네치아 여행자들이라면 예외 없이 찾는 이곳은 다른 유럽 대도시의 전형적 광장과 같은 구조로 베네치아에서 가장 넓은 공간입니다. 거대한 돔과 황금빛 모자이크로 장식된 산 마르코 대성당, 연분홍 대리석에 섬세한 무늬가 새겨진 두칼레 궁전 그리고 부드러운 곡선미를 뽐내는 회랑이 광장을 아늑하게 둘러싸고 있습니다. 성당 꼭대기에서 반짝이는 날개 달린 황금빛 사자는 베네치아의 상징입니다. ‘베니스 영화제’로 우리에게 친숙한 국제영화제가 열리는 곳이 베네치아의 휴양지인 리도섬이고 그 최우수상의 명칭이 황금사자상인 연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옛날 베네치아공화국의 위세를 여실히 보여주는 두칼레 궁전은 화려하고 웅장합니다. 이 건물은 오랫동안 도시를 지배했던 베네치아 총독의 주거지이자 공화국 청사로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궁전의 한 귀퉁이를 연결한 탄식의 다리입니다. 그 옛날 궁전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다리를 건너 감옥으로 향하던 죄수들이 세상과 단절되는 절망감에 통곡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합니다. 세기의 바람둥이로 알려진 사교계의 슈퍼스타 카사노바 역시 이 다리를 건너 감옥으로 향했습니다.

레스토랑과 기념품점이 즐비한 광장에는 괴테, 토마스 만, 바이런, 루소 등이 즐겨 찾았다는 ‘카페 플로리안’ 이 1720년부터 지금까지 같은 자리에서 손님을 맞고 있습니다. 광장에 늘어놓은 야외 테이블 사이로 하얀 양복에 까만 나비넥타이를 정갈하게 멘 종업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나폴레옹이 ’유럽에서 가장 우아한 응접실‘이라 극찬했던 광장 카페에서 감미로운 음악과 함께 커피를 마시며 유럽 귀족이 된 듯 호사를 누려봅니다.

 


 

베네치아의 부속섬,
유리공예 전시장 무라노 섬과 무지갯빛 색의 향연 부라노 섬

본섬도 좋지만 베네치아에서는 수상 버스를 이용해 저마다의 색깔을 지닌 매력적인 섬들을 여행할 수 있습니다. 산 마르코 광장을 넘어 넓은 바다로 나가면 물 위에 불쑥불쑥 솟은 말뚝이 널려 있습니다. 아무렇게나 솟은 듯 보이지만 인근 섬으로 연결되는 베네치아 수상 버스의 뱃길입니다.

이른 아침 수상버스를 타고 무라노 섬에 내려 느긋하게 산책을 시작합니다. 고요한 공원에 선 독특한 가로등과 다양한 유리 조각품이 눈길을 끕니다. 아직 문을 열지 않은 공방 진열장에는 독특한 유리 공예품들이 아침 햇살에 아름답게 반짝입니다. 유리공예 전시장에서는 전통 기법으로 유리 공예품을 만들어 내는 장인들의 작업 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장인은 빨갛게 달아오른 유리를 볼이 터져라 풍선처럼 부풀리고 다듬어서 말, 꽃병 등을 순식간에 만들어냅니다. 마치 노련한 마술사의 쇼를 보는 듯합니다.

13세기까지만 해도 본섬에서 번창했던 베네치아 유리 공예품은 유럽 각국의 왕실과 귀족층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습니다. 유리공예품을 탐낸 유럽 각국에서 베네치아의 기술을 빼돌리려 하자 베네치아 사람들은 이를 막기 위해 기술자들을 무라노 섬으로 이주시켰습니다. 그 때문에 무라노 섬이 오늘날의 유리공예 전시장으로 탈바꿈한 것입니다.


 

본섬에서 40분. 물길을 달려 도착한 부라노 섬은 베네치아 여행객에게 가장 인기 있는 부속 섬입니다. 이 작은 섬마을의 매력 포인트는 무지개처럼 알록달록한 색채입니다.

수상 버스에서 먼발치에 보이는 섬의 모습은 바다 위에 뜬 무지개처럼 곱고 화려합니다. 마을 안쪽으로 들어서면 수로 양편으로 형형색색의 집들이 늘어서 있습니다. 물 위에 비친 카페와 공방의 알록달록한 풍경은 마치 동화 속 풍경처럼 느껴집니다. 오밀조밀 들어선 주택 창가의 화분이 생기를 더해줍니다. 골목 곳곳에 널어놓은 빨래가 바람에 너울너울 춤추고 소꿉놀이하는 아이들과 레이스를 뜨는 아낙들의 평화로움이 어우러진 곳. 부라노 섬은 지상낙원을 꿈꾸게 합니다.

현란한 색채와 평화로움에 매료되어 연신 셔터를 누르다 보니 대용량 메모리 카드의 용량이 금세 채워집니다. 부라노는 그야말로 사진을 위한 아름다운 섬입니다. 아름다운 건물의 채색은 그 옛날 고기 잡으러 나간 어부들이 으슥한 밤이나 자욱한 안개 속에서 자기 집을 쉽게 찾기 위함이었습니다. 빛바랜 색을 바꿀 땐 구역마다 지정된 몇 가지 색 중 마음에 드는 걸 고르게 되어있었습니다. 덕분에 화려한 원색의 건물들이 튀는 법 없이 하나로 어우러져 부라노 특유의 색채 미학이 되었습니다.


 

부속섬 여행을 마치고 느지막이 도착한 산 마르코 광장 옆 수상 버스 선착장. 파도가 넘실대는 탁 트인 바다 건너편 산 조르조 마조레 성당과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의 파노라마가 한눈에 펼쳐집니다. 석양에 물들어 황금빛으로 아름답게 빛나는 선착장 풍경은 베네치아 여행의 백미입니다. 영업을 마친 선착장 곤돌라에 짙은 푸른 기가 감돌고 가로등이 불을 밝히기 시작합니다. 여행자의 낭만에 맞춰 고달픈 하루를 보낸 뱃사공, 그의 애환을 실은 곤돌라는 출렁이는 물결에 아리아 선율처럼 오르락내리락하며 아련하게 사라집니다. 그렇게 베네치아 여행도 아쉬운 막을 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