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모나리자를 능가하는 한국의 미소

2017/03/10

이 그림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진짜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데도 실제로 본 것 마냥 너무도 익숙하고 친숙한 이미지. 수없이 다양하게 복제되고 일상 속에 찬연하게 퍼져 있는 바로 그 얼굴. ‘신비로운 미소’의 대명사로 불리는 모나리자.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을 대표하는 희대의 명작. 알 듯 모를 듯 수수께끼 같은 미소로 지금까지도 구구한 억측과 궁금증을 낳고 있는 그림이지요.

운 좋게도 두 번이나 직접 그림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보면 실은 여간 실망스러운 게 아니에요. 크기도 작을뿐더러 워낙에 관람객들로 빽빽하게 둘러싸여 있어서 가까이서 그 신비로운 미소를 대면한다는 건 애당초 불가능하니까요. 차라리 복제된 이미지로 감상하는 편이 훨씬 더 낫지요. 뭐 사정이야 어떻든 수천 년 서양미술의 역사에서 ‘미소’ 하면 첫 손에 꼽을 만한 작품이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겁니다.

금동반가사유상, 삼국시대 <6세기 후반>, 높이 83.2cm, 국보 78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렇다면 우리 문화재 속에는 어떤 미소가 담겼을까요. ‘한국의 미소’ 하면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불세출의 명작 금동반가사유상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 비슷한 시기의 불상이 각각 국보 78호와 83호로 지정돼 있는데, 아무래도 인간적인 매력은 78호 쪽이 좀 더 돋보이지 않나 싶어요. 만면 가득 은은하게 배어 나오는 저 천상의 미소. 보면 볼수록 마음이 푸근해지는 한국의 미소입니다.

불상에는 그 시대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지요. 특히 반가부좌를 한 채 미소 짓고 있는 미륵보살(彌勒菩薩)은 모진 억압에 고통 받고 신음했던 백성들에게 구세주 같은 존재였습니다. 기댈 곳 없는 막막한 현실에 한 줄기 빛과 같은 구원자. 그래서 미륵보살은 늘 변함없이 온화하고 넉넉한 미소로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습니다. 그래, 그래, 그래, 모든 게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다 잘 될 거라고, 말이에요.

‘신라의 미소’ 얼굴무늬 수막새에 얽힌 사연

일제강점기였던 1934년, 조선총독부 기관지 <조선> 6월호에 ‘신라의 가면와’란 제목의 글이 실립니다. 내용인즉슨 당시 경주의 야마구치 병원에서 일하고 있었던 27살의 젊은 의사 다나카 다카노부가 경주 읍내 일본인 골동품상에게서 유물 한 점을 구입했는데, 특이하게도 사람 얼굴 모양을 한 기와장식이었습니다. 당시에도 큰 화제가 됐는지 잡지에까지 소개되지요. 글쓴이 역시 당시 경주고적보존회에서 활동하던 오사카 긴타로라는 일본 사람입니다.

유물의 소유자인 다나카 다카노부는 1940년 일본으로 돌아갑니다. 그렇게 영영 이별할 운명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20여 년 세월이 흐른 뒤 용케도 유물의 존재를 기억해낸 분이 있었어요. 당시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장이었던 박일훈 선생입니다. 끈질기게 유물의 소재를 추적한 끝에 1972년, 마침내 유물의 주인인 바로 그 의사 다나카 다카노부와 연락이 닿게 됩니다. 박 선생은 유물을 기증해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고, 결국 마음이 움직인 다나카는 그해 10월 직접 경주박물관을 찾아 유물을 기증합니다.

얼굴무늬 수막새, 신라, 현재길이 11.5cm,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그렇게 한 뜻있는 분의 간절함이 결실을 맺어 되찾아온 귀중한 유물이 바로 지금 우리가 ‘신라의 미소’라 부르는 얼굴무늬 수막새입니다. 1932년, 지금의 경주시 사정동 영묘사 터에서 출토된 이 유물은 지붕에 얹는 기와 중에서 하늘을 향해 볼록한 수키와(목조건축의 지붕을 덮는 반원통형의 기와)의 끝에 장식하는 유물이에요. 다른 말로 와당(瓦當)이라고도 합니다. 기와의 뒷면에 수키와를 붙였던 흔적이 남아 있어 실제로 지붕 장식에 쓰였다는 걸 알 수 있지요.

보면 볼수록 끌리는 이 느낌은 대체 뭘까요? 서글서글하고 한없이 정다운 저 눈매와 두툼하게 아래로 흐르는 콧대, 그 아래로 한가득 머금은 자애로운 미소. 저토록 향기로운 웃음을 흙으로 빚어 구워낼 줄 알았던 신라 도공의 마음에도 따뜻한 미소가 흘러 넘쳤을 겁니다. 더욱이 틀에다 찍어낸 게 아니라 도공이 손으로 직접 빚은 것이라니 말이에요. 이런 기와장식을 실제로 사용할 줄 알았던 옛 사람들의 ‘파격’은 또 어떻고요.

그래서 신라의 미소는 1998년 경주세계문화엑스포 당시 ‘새천년의 미소’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사용됐고, 저 유명한 경주 빵의 상표에까지 등장하며 ‘신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으뜸 이미지가 됐지요. 그 미소에 매료된 시인들이 앞 다퉈 노래로 화답했으니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렸다는 이봉직 시인의 동시 ‘웃는 기와’ 한 대목이 참 따뜻하게 다가옵니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이미지는 시대의 간극을 넘어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까지 풍부한 상상력을 제공합니다. 명품의 가치는 그래서 현재진행형이라고 했다지요. 신라의 미소에서 깊은 감흥을 얻은 또 다른 시인이 있습니다. 천 년을 훌쩍 뛰어넘는 유구한 세월에도 전혀 빛 바라지 않은 그 소탈하고 후덕한 미소. 시인의 마음은 그 고운 웃음의 결을 따라 시간을 초극하는 깨달음의 세계를 유영합니다.

깎아지른 벼랑에 새겨진 백제의 미소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백제 <7세기 초>, 국보 84호

먼 옛날 백제 사람들이 터를 닦고 살았던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대대로 강댕이골이라 했던 용현계곡 한 쪽 벼랑에 새겨진 부처의 존재를 이곳 주민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 부처가 찬란한 백제 불교의 유산이라는 사실은 1959년에야 재발견됩니다. 지금 우리가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이라 부르며 국보로 귀하게 여기는 바로 그 마애불입니다.

유물 안내판의 설명에 따르면 가운데가 석가여래입상, 왼쪽이 제화갈라보살 입상, 오른쪽이 미륵반가사유상입니다. 세 부처를 나란히 새겼다 해서 이런 배치를 ‘삼존불 형식’이라 하는데요. 왼쪽에 보주(寶珠)를 든 보살이 과연 누구냐를 놓고 지금까지도 해석이 분분하답니다. 중국이나 일본, 심지어 같은 한반도 내에서도 신라나 고구려에선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구성이라 하더군요. 하지만 그런 학술적인 부분은 전문가들에게 맡겨두기로 하고, 아무 편견 없이 돌에 새겨진 부처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기로 합니다.

세 분이 모두 만면에 환한 미소를 띠고 있지요. 따로 따로 떼어놓고 보아도 참 좋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가운데 본존상의 얼굴을 한 번 볼까요. 영락없는 뭇사람의 얼굴입니다. 국보 금동반가사유상에서 보던 그 거룩하고 우아한 부처님이 아니라 친근한 옆 집 아저씨의 딱 그 모습이에요. 부리부리한 눈매, 뭉툭한 코, 두툼한 입술, 둥그런 형태에 살집 넉넉한 얼굴이지요. 하늘의 사람이 아니라 땅의 사람, 다시 말해 서민의 얼굴인 겁니다.

그래서 서산마애불은 서민 불상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답니다. 유홍준 선생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서산마애불에 얽힌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일화들이 소개돼 있는데요. 서산마애불이 발견된 직후에 우리나라 고고학의 선구자인 김원용 선생이 이런 유명한 제안을 했다고 해요.

“거대한 화강암 위에 양각된 이 삼존불은 그 어느 것을 막론하고 말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진 인간미 넘치는 미소를 띠고 있다. 본존불의 둥글고 넓은 얼굴의 만족스런 미소는 마음 좋은 친구가 옛 친구를 보고 기뻐하는 것 같고, 그 오른쪽 보살상의 미소도 형용할 수 없이 인간적이다. 나는 이러한 미소를 ‘백제의 미소’라고 부르기를 제창한다.”

그래서 백제의 미소가 된 거였어요. 2012년 서산마애불을 직접 답사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그 사람 좋은 미소 앞에서 그때 저는 무엇을 생각하고 소망했을까요. 저 바위 위에서 1400여 년을 한 결 같은 미소로 살아낸 부처님은 그 모든 시름도 잊고 팍팍한 세상사도 잠시 내려놓고 여기서 잠시나마 편히 머물다 가시게, 하는 것만 같습니다. 그렇게 먼먼 옛날의 백제인은 까마득한 후손들에게 한없이 따뜻하고 아름다운 미소를 남겼지요.

흙으로 만든 부처와 보살, 고구려 <6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신라의 미소, 백제의 미소도 있는데 혹시 고구려의 미소라 부를 수 있는 건 없을까? 궁금해서 이리저리 자료를 뒤져보니 아주 흥미로운 유물이 등장하더군요. 국립중앙박물관 고구려 실에 가면 한 쪽에 흙으로 빚은 작은 부처와 보살들이 다소곳이 자리를 잡고 있지요. 1937년 평안남도 원오리(元五里) 옛 절터에서 한꺼번에 발굴된 이 소조불(흙을 빚어 만든 불상)은 6세기 중엽 이후에 만들어진 출토지가 분명한 고구려 불상이라 합니다.

온전한 불상과 보살상에 파편까지 하면 312개나 한자리에서 출토됐다 하는데요. 그 중에서도 앉아서 가지런히 두 손 모으고 있는 보살상 두 점에 유독 마음이 끌립니다. 순전히 흙으로 빚은 것들이 자그마치 1500년 세월에도 저토록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니 놀랍지요. 게다가 단정하게 앉아 예를 갖춘 보살들의 저 생생한 표정은 또 어떤가요. 가만히 눈을 감은 채 한없이 온화한 표정으로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바짝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그 환한 미소가 한결 도드라져 보이지요.

수월관음도에서 찾은 고려의 미소

눈치 채셨겠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유물들은 대부분 불교 문화재입니다. 그리고 이 전통은 불교국가인 고려로 이어지게 되지요. 고려가 남긴 찬란한 문화유산 가운데 특별히 세 가지를 꼽을 만합니다. 청자와 나전칠기, 그리고 불화(佛畫)입니다. 2010년 10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고려불화대전>이란 기념비적인 전시가 열립니다. 전 세계 각지에 흩어진 고려불화 108점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었던 실로 역사적인 전시였어요.

이 전시가 그토록 중요했던 까닭은 국내에 남아 있는 고려불화가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대다수가 일본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어서 한자리에 모으는 것 자체가 대단히 힘든 일이거든요. 한 달하고도 열흘 남짓한 전시 기간 동안 전국의 승려들이 몇 번이고 전시장에 다시 찾아와 그림 속 부처님 앞에서 기도하고 불공을 드리는 보기 드문 장면도 연출됐습니다. 평생에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처럼 말이에요.

수월관음도, 고려 후기, 비단에 색, 106.2×54.8cm, 보물 1426호,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소장

고려불화 최고의 미소가 여기에 있습니다. 고려 후기에 조성된 수월관음도입니다. 수월관음(水月觀音)이란 말 그대로 물에 비친 달을 내려다보는 관음보살을 가리킵니다. 수월관음도는 남인도의 바닷가에 있는 보타락가산(補陀洛迦山)의 연못가 바위에 앉아 선재동자(善財童子)의 방문을 받고 있는 관음보살의 모습을 그린 겁니다. 그림 속 관음보살은 선재동자를 내려다보고 있지요. 후덕한 얼굴에 은은하게 번지는 저 미소를 한 번 보세요. 가히 압권입니다.

그런데 관음보살의 표정만 그런 게 아니에요. 선재동자를 한 번 자세히 들여다보세요. 저 천진난만하고 앙증맞은 입술에 머금은 미소를 어디에 비할 수 있을까요. 숱한 수월관음도를 보았어도 이렇게 자애롭고 우아한 미소로 보는 이를 따뜻하게 해주는 명품은 결코 흔하지 않습니다. 고려불화 최고의 명작으로 꼽기에 손색이 없는 이 작품을 언젠가 꼭 한 번 다시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저리도 곱고 아름다운 고려의 미소를 말입니다.

서민적인 해학이 빚어낸 조선의 미소

유교 국가인 조선 시대에 이르면 그 전까지 문화 전반을 지배했던 불교의 영향력이 몰라보게 위축됩니다. 굳이 빗대어 설명하자면 줄곧 신의 영역을 지향했던 문화예술이 그제야 비로소 인간의 영역으로 내려왔다고 할까요. 조선의 미소를 딱 지칭해서 이거다, 못 박은 글을 보진 못했습니다. 하지만 조선 하면 역시 풍속화를 빼놓을 수 없겠지요. 우리에게 너무나도 친숙한 단원 김홍도의 그림 속엔 ‘조선의 미소’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풋풋하고 건강한 서민들의 웃음이 한가득 담겨 있습니다.

김홍도, <단원풍속도첩>, 27.8×23.8cm, 보물 제527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서당 훈장 선생님께 혼이 났는지 울음을 참지 못해 훌쩍거리는 아이, 그 모습을 아이고 고소해라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해맑게 웃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이 참 정겹지요. 시끌벅적한 장터 한가운데서 펼쳐지는 한 판 씨름을 구경하는 사람들의 천차만별 다양한 표정은 또 어떤가요. 누구는 웃고 누구는 자못 심각한 표정인데, 다들 판돈 두둑하게 걸었다면 마지막에 웃는 이는 과연 누가 될까요. 악사들의 연주에 맞춰 춤을 추는 아이의 저 환한 미소 역시 참 따뜻하고 아름답습니다.

김홍도의 그림은 보는 이를 한없이 따뜻하게 해줍니다. 더도 덜도 보탤 것 없는 서민들의 수수하고 꾸밈없는 삶을 화폭에 그려낼 줄 알았던 화가의 따뜻하기 그지없는 시선, 그 마음의 결이 느껴지니까요. 넉넉함과는 거리가 멀었을 팍팍한 삶의 현장 속에서도 늘 웃음과 미소를 잃지 않았던 우리 조상들. 바로 그 미소가 그저 벗어나고만 싶은 고통에 불과했을 고단한 일상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힘이었을 겁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단원 풍속도첩>에 수록된 풍속화 24점 하나하나가 모두 조선의 미소를 가득 담고 있습니다.

영화 <왕의 남자> 기억하시나요. 광대들의 삶과 사랑, 시련과 애환을 그린 이 영화에는 조선시대 전문 연예인이었던 광대들이 펼쳐 보이는 갖가지 예능이 선보이는데요. 그 중에서도 얼굴에 탈을 쓰고 노는 탈놀이 장면은 보는 이를 짜릿하고 조마조마한 긴장감 속으로 몰고 갑니다. 우리 문화재 가운데 탈이 국보로 지정돼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아요. 경북 안동의 유서 깊은 하회마을과 이웃 병산마을에 전해지는 탈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회탈이라 부르는 것들이지요.

(좌) 중탈,  <안동 하회탈 및 병산탈>, 국보 제121호, 하회병산동민 소유, 국립중앙박물관 위탁 보관

 (우)-(상) 이매탈, (중) 부네탈, (하) 선비탈, 

하회탈 하면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익숙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게 바로 ‘중탈’입니다. 입 주위를 중심으로 얼굴 부분과 턱 부분이 따로 만들어져 줄로 이어놓은 걸 볼 수 있지요. 초승달 모양을 닮아 여지없이 환한 웃음을 떠올리게 하는 눈과 눈썹, 콧구멍이 잔뜩 커진 듯 뭉툭한 코와 불룩 솟아오른 광대뼈, 마치 허허허 웃는 소리가 들릴 것처럼 쩍 벌린 입모양까지 영락없는 박장대소의 표정입니다.

국보로 지정된 탈은 모두 13점입니다. 이 가운데 하회탈이 주지 2개, 각시, 중, 양반, 선비, 초랭이, 이매, 부네, 백정, 할미까지 해서 11점이고, 병산 탈은 2점이 남아 있습니다. 탈은 원래 해마다 정월대보름에 별신굿을 할 때 쓰던 물건이에요. 보통 바가지나 종이로 만들었기 때문에 굿이 끝나고 나면 태워버리는 게 일반적이었다고 합니다. 요행히 13점이 남아 국보가 될 수 있었던 건 이례적으로 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이지요.

그 유래가 정확히 밝혀지진 않았지만 탈은 고려시대부터 만들어진 걸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꽤 유구한 역사를 가진 셈이지요. 오리나무를 깎은 뒤 옻칠을 여러 겹 해서 반들반들하고 운치 있는 색을 냈다고 합니다. 그냥 보고만 있어도 절로 웃음이 나는 이런 탈을 쓰고 정월대보름에 한바탕 흥겨운 굿판을 벌였을 옛 사람들의 흥취가 탈에 담긴 각양각색의 표정에 생생하게 담겨 있는 듯합니다. 탈 하나하나에 새겨진 저 웃음, 저 미소야말로 조선의 미소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웃을 일이 없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사는 요즘입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가 만만치 않아서일까요. 하지만 그 옛날이라 해서 다르진 않았겠지요. 육신의 병을 이겨내는 최고의 묘약이 바로 웃음이라 말하듯 마음의 병을 치유해주는 것도 다름 아닌 웃음입니다. 누천 년 조상들의 손때 묻은 소중한 유물에서 찾아낸 한국의 미소. 그 미소에서 삶의 희망과 활력을 얻었던 옛 사람들의 넉넉한 마음을 만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