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사진이야? 그림이야?

2017/04/14

뭔가 말을 꺼내려는 걸까요? 살짝 벌린 입술 사이로 당장이라도 무슨 이야기가 흘러나올 것만 같습니다. 조금은 상기된 표정을 짓고 있는 저 앳된 모습의 여인은 지금, 바로 당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습니다. 일단 마주치면 도저히 피할 수 없을 것 같은 강렬함이 한 줄기 빛처럼 보는 이의 마음을 파고들지요. 도대체 저 여인에게는 어떤 내밀한 사연이 감춰져 있는 걸까요.

섬광처럼 다가온 이 여인의 얼굴을 처음 대면했을 때 저는 무척 놀랐습니다. 그림입니다. 사진이 아니었어요. 직접 보여드리지 못하는 게 몹시도 안타까울 만큼 그 생생한 사실감이 화폭 전체를 휘감아 돌지요. 화가의 작업실 한쪽에 가만히 웅크리고 있던 그 얼굴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욱 더 놀라운 모습으로 눈을 사로잡았습니다. 사진 같은 그림을 사진으로 보여드려야 한다는 것도 참 아이러니하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에요.

여인의 상반신을 그린 작품의 옷 주름과 머리 부분을 따로 확대해 보면 한 마디로 입이 딱 벌어지고 맙니다. 세상에나, 도대체 이걸 어떻게 그렸을까요. 더 놀라운 건 이 그림이 수채화라는 사실입니다. 사진인지 그림인지 구분이 안 갈만큼 극도의 사실감을 살린 이런 유형의 그림들을 흔히 극사실주의 회화라고 부르는데요. 이 부류의 그림을 그동안 꽤 많이 보았어도 수채 물감으로 저토록 정밀한 세계를 그려낼 수 있다는 데는 그만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림을 그린 이는 윤위동. 30대의 젊은 서양화가입니다. 이미 20대 시절부터 극사실주의 기법의 인물화에서 출중한 재능을 선보여온 터라 윤위동의 작품 세계는 미술 애호가들 사이에서 제법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고등학교 때 수채 물감으로 소묘를 해서 주변을 깜짝 놀라게 한 게 계기가 돼서 지금까지 줄곧 수채화 작업을 해오고 있다고 하더군요. 저토록 생생한 그림을 완성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붓질이 필요했을까요.

화가의 역량을 평가하는 좋은 척도의 하나는 사람의 손발을 얼마나 잘 그리느냐 하는 겁니다. 보통 사람을 그릴 때는 얼굴 묘사가 가장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보다 더 어려운 게 손과 발이라고 해요. 정확한 비례와 균형, 위치와 자세는 물론 동작까지도 조금만 계산이 어긋나면 굉장히 어색해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래서 윤위동 작가의 초창기 작품들 중에는 유독 손과 발을 정밀하게 묘사한 것들이 많습니다. 그 도저한 사실감에선 섬뜩함마저 느껴지지요.

모든 예술가가 대체로 마찬가지겠지만 화가들도 늘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섭니다. 계속 똑같은 그림만 그릴 순 없으니까요. 남의 입맛에 맞는 그림만 계속 그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그래서 화가로서,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 진정한 나의 세계를 찾아가는 고통스러운 모험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윤위동 작가가 3년 만에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유형의 작품들을 선보였지요.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바로 ‘모래’입니다.

(좌) 윤위동, <Glory1>, 모래 위에 아크릴 채색, 130×160cm, 2016

(우) 윤위동, <Glory2>, 모래 위에 아크릴 채색, 80×240cm, 2017

왼쪽 그림을 자세히 볼까요. 캔버스에 진짜 모래를 발라 붙인 뒤에 화면 가운데 아래부터 돌들이 점점 커지다가 다이아몬드 결정으로 진화하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각각의 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다이아몬드의 휘황한 광채와 그림자까지 정교한 솜씨는 여전하지요. 다만, 모래라는 재료의 특성 때문에 수채 물감 대신 채색이 쉽고 잘 마르는 아크릴 물감으로 바꿨다고 합니다.

작은 모래 알갱이가 커지고 커져서 끝내는 아름다운 보석으로 완성되어가는 그 자취에다가 작가는 진리를 찾아가는 여정을 담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예술 세계 또한 그렇게 한껏 무르익어 찬란하게 꽃피길 바라는 마음도 함께 담겨 있겠지요. 낱낱의 존재들은 모두 흔적을 남기게 마련. 그래서 오른쪽 그림은 모래라는 세상 위에 돌들이 지나간 자취가 일정한 간격으로 남아 있습니다. 완성을 향해 가는 과정이라고 할까요.

(좌) 윤위동, <자취 3>, 장지 위에 수채, 116×64cm, 2016

(우) 윤위동, <추종1>, 장지 위에 수채, 색연필, 2016

윤위동 작가의 또 다른 변화를 보여주는 곤충 그림들입니다. 이번에 새로 발표한 신작들인데요. 마치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것처럼 생생하지요. 화가의 뛰어난 관찰력과 표현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들입니다. 장지에 수채화로 그리는 특유의 기법은 여전하지만, 주로 인물 묘사에 집중했던 것과는 사뭇 달라졌지요. 화가는 이 유형의 그림에 하나같이 ‘자취’나 ‘추종’이란 제목을 붙여 놓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왼쪽 그림이 화면 오른쪽의 희미한 존재가 차츰 또렷해지면서 개미라는 한 개체로 완성되는 과정을 보여준다면, 오른쪽 작품은 대장격인 개미 뒤로 수많은 작은 개미가 따르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두 개미를 가까이 들여다보면 작은 물방울들이 알알이 맺혀 있는 걸 볼 수 있거든요. 화가는 결국 이런 과정들, 흔적들을 통해서 순환하는 자연의 질서와 섭리, 더 나아가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끈끈하게 이어지는 윤회의 철학을 표현해보고 싶었다고 합니다.

화가의 이런 깊은 뜻을 알고 나면 작품을 대하는 마음가짐도 달라질 수밖에요. 극사실주의 그림들은 일단 그 외형의 화려함으로 보는 이를 사로잡지요. 하지만 사람도 겉모습만 잘생기고 예쁘다 해서 다가 아니듯, 화가들이 별 의미도 없이 자기 그림 솜씨 뽐내보려고 극사실주의 그림에 몰두하는 건 결코 아닙니다. 새로운 세계를 추구하는 예술가로서 삶의 진실에 한 발이라도 더 다가가려는 것이지요. 그래서 팔이 빠지도록 그리고 또 그리는 것이고요.

디에고 코이 <반사>, 종이에 연필

사전을 찾아보면 극사실주의(hyperrealism)를 “주관을 극도로 배제하고 사진처럼 극명한 사실주의적 화면 구성을 추구하는 예술양식”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1960년대 후반에 미국에서 크게 유행한 팝 아트(Pop Art)의 강력한 영향 속에서 탄생했기 때문에 지극히 미국적인 리얼리즘의 한 흐름으로 여겨지지요. 슈퍼리얼리즘(superrealism), 포토리얼리즘(photorealism), 래디컬리얼리즘(radicalrealism) 등등 부르는 용어도 꽤 다양합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유행이 생겨난 걸까요? 당시 미국 미술의 주류는 추상미술이었습니다. 그런데 제 아무리 추상미술이 대단하다 해도 대중에겐 사실 잘 와 닿지 않았지요. 도대체 뭘 그린 건지 도통 모르겠으니 말이에요. 그런 추상미술이 미술 권력의 정점에서 장기 집권 체제를 이어가자 반기를 든 화가들이 등장합니다. 화가들이여! 다시 붓을 들라! 거칠게 말씀드리면 극사실주의는 이런 맥락에서 탄생한 겁니다.

페드로 캄포스, <Hot Day III>, 캔버스에 유채, 120×170cm

사진 같다! 사진보다 더 실감 난다! 똑같다! 극사실주의 그림을 본 사람들이 보이는 흔한 반응입니다. 한 마디로 잘 그렸다는 거지요. 똑같이 그릴 수 있는 화가의 수고와 능력에 감탄하는 겁니다. 자타공인 누구나 잘 그렸다고 고개를 끄덕인다는 뜻이거든요. 그래서 극사실주의 그림은 사진과 곧잘 비교됩니다. 사진이야 카메라 셔터만 눌러도 누구나 쉽게 얻을 수 있지만, 그걸 그림으로 그린다고 생각해 보세요. 아무나 그릴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우리나라에서 극사실주의가 등장한 과정도 비슷합니다. 1970년대 우리 미술계를 주름 잡은 건 최근 한껏 몸값이 뛰고 있는 ‘단색화’로 대변되는 추상미술이었지요. 여기에 대한 반성으로 1980년대에 싹을 틔운 사실주의 미술의 흐름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극사실주의였던 겁니다. 그 뒤로 별 뚜렷한 흐름을 보여주지 못하다가 2000년대 중반 미술시장의 본격적인 성장과 함께 다시 무대 전면에 나서게 됩니다.

김창영 <Sand Play>

모래 그림으로 유명한 김창영 화백의 작품입니다. 캔버스에 모래를 얇게 바른 뒤에 붓으로 세밀하게 다시 그려서 완성한 건데요.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 화백은 이른바 ‘모래 회화’라는 독보적인 세계를 구축하며 전 세계에서 주목을 받았지요. 부산에서 살았던 1970년대 후반에 바닷가 모래밭에서 영감을 얻어 그리기 시작했다고 하니 모래만 그린 세월이 어느덧 40년을 헤아립니다.

화가는 모래 위의 흔적들이 쉴 새 없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모습에서 ‘존재의 생성과 소멸’을 보았다고 해요. 그저 모래밭을 실감나게 그렸구나, 쉽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진짜 모래를 캔버스에 얹고 그 위에 다시 물감을 발라 진짜와 가짜, 현실과 가상의 차이가 뭔지를 생각하게 만들지요. 그저 똑같이만 그린 건 아니란 뜻입니다. 바로 여기에 극사실주의 회화의 존재 이유가 있는 거고요.

이목을, <空1017>, 판넬에 유채, 2010년경 (이미지 출처: 아트뮤제)

극사실주의가 대중에게 열렬한 지지를 얻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화가의 노고입니다. 지독할 정도의 끈기와 집착, 정성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지요. 완벽에 가까운 화가의 손재주에 감탄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겁니다. 물론 초창기에는 영혼은 없이 기교만 앞세운 그림이란 비난도 적지 않았다고 해요. 하지만 손으로 그린다는 그 행위 때문에 도리어 극사실주의 회화가 보여주는 아날로그적 가치는 더 돋보입니다.

반면 그걸 그려내는 화가에겐 고통입니다. 위에 소개하는 그림은 ‘대추 화가’로 유명한 이목을 화백의 작품이에요. 마치 화면에서 대추가 툭 튀어나올 것만 같은 생생한 사실감 덕분에 이목을 화백의 작품들은 한동안 굉장히 귀하신 몸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화가에겐 그게 그만 독이 되고 말았지요. 갈수록 나빠지는 시력을 되찾을 길이 없었으니까요. 터럭 한 올까지 현미경 보듯 정교하게 그려야 했으니 직업병에 시달렸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습니다.

(왼쪽부터) 김대연 作, 정창기 作, 이창효 作, 윤병락 作

실제처럼 생생한 그림 앞에 서면 누구나 만져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촉각을 자극한다는 바로 그 점이야말로 극사실주의 회화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싶어요. 이목을 화백의 대추 그림도 그렇지만 극사실주의 화가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주특기가 있습니다. 남들은 그리지 않는 걸 찾아서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는 거지요. 우리나라에도 독보적인 개성을 지닌 극사실주의 화가들이 꽤 많습니다. 

위에서 맨 왼쪽은 김대연 화백의 포도 그림입니다. 포도를 얼마나 많이 그렸으면 ‘포도 그림의 대명사’로 불릴 정도에요. 저걸 그렸어 하는 반응이 절로 나오지요. 극사실주의 화가들 중에는 이렇게 정물, 특히 과일을 주로 그리는 화가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딸기와 자두 그림으로 유명세를 얻은 정창기, 역시 자두를 많이 그린 이창효, 사과 그림의 윤병락 등은 지속적으로 과일을 소재로 한 정물화를 그려온 화가들입니다.

(왼쪽부터) 박종경 作, 김영성 作, 남학호 作, 류재현 作

동식물을 소재로 작품 활동을 하는 화가들은 꽤 많습니다. 이광호는 선인장 종류의 식물을, 박종경은 콩을 화폭에 가득 채워 넣습니다. 김영성은 어항 속 금붕어나 달팽이, 개구리, 곤충 따위를, 박정빈은 잉어를 즐겨 그리지요. 그런가 하면 자연 자체로 시선을 돌려 자갈밭 풍경에 초점을 맞춘 남학호나 숲 자체를 묘사의 대상으로 삼은 류재현의 그림도 눈여겨 볼 만합니다. 살아 있는 생명체를 살아 있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극사실주의의 정체성과 딱 맞아떨어진다고 할 수 있겠지요.

 

(왼쪽부터) 안성하 作, 고영훈 作, 설경철 作, 이석주 作, 배주 作

그런가 하면 움직이지 않는 사물들을 작품의 소재로 끌어들이기도 하는데요. 유용상과 안성하는 유리잔에 무언가를 담은 형상을 주로 선보이고 있지요. 책 그림 하면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고영훈, 설경철의 그림도 책 좋아하는 분들의 취향을 사로잡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입니다. 다른 시점을 보여주는 이석주의 그림도 책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장난감 레고만 집중적으로 그린 덕분에 한때 ‘레고 작가’로 불렸던 배주라는 화가도 빼놓을 수 없지요.

강형구,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259×193.5cm, 1999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극사실주의 회화의 본령은 인물 초상이 아닐까요. 극사실주의 인물화 분야에서는 해외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는 우리 화가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분이 바로 강형구 작가에요. 2001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자화상과 우리 시대의 우상들을 화폭에 그려왔지요. 익히 알고 있는 인물들을 다르게 그림으로써 그 사람에 대한 사유의 폭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정중원 作

최근 해외에서 대단한 호평을 받은 젊은 극사실주의 화가 정중원의 작품 역시 놀라움을 줍니다. 이 작품을 본 해외 언론이 실제 사진과 그림을 비교해서 보여주기도 했는데요. 사실 저는 전혀 구분을 못하겠더라고요. 그 정도로 실제처럼 묘사하는 재주가 뛰어나 해외에도 활발하게 작품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인물화로 국내외에 이름을 알린 화가들로 이상원, 강강훈, 한영욱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왼쪽부터) 이상원 作, 강강훈 作, 한영욱 作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아마도 모든 예술에 통용되는 말일 겁니다. 사진 같아서, 실제보다 더 실제 같아서 놀라움을 주는 극사실주의 회화는 무엇보다 어렵지 않아서 친근하게 다가옵니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세상을 고스란히 보여주니까요. 하지만 화가에 따라, 소재에 따라 거기에 담긴 의미와 정신은 천차만별이지요. 화가들이 수백, 수천만 번의 붓질을 마다않고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완성된 작품은 그래서 하나의 작은 세상이기도 합니다. 당연히 그 속엔 생생한 우리네 삶이 숨 쉬고 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