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게 해(Aegean Sea)를 건너 신화의 섬으로
이웃 섬 산토리니(Santorini)에서 크레타(Crete)로 넘어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에게 해를 건넌다는 것은 다른 바다 여행과 느낌이 달랐다. 파도를 가르며 크레타로 가는 뱃길 내내 가슴이 설렜다. ‘그리스인 조르바(Zorba the Greek)’에서 주인공 영국 작가 바실과 조르바가 바닷바람을 맞으며 배 저편에서 이야기를 나눌 때 이런 느낌을 느꼈을까? 그 책의 저자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의 무덤이 있는 곳, 무수한 신화를 간직한 곳. 바로 크레타다.
그리스의 영웅 테세우스(Theseus)의 아버지인 아테네 왕 아이게우스(Aegeus)가 에게 해의 근원이다. 아버지 아이게우스가 임신한 아내를 떠나며, 칼과 신발을 커다란 돌 밑에 묻었다. 그리고 아들이 태어나 돌을 옮길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이 징표와 함께 자신에게 보내라 부탁했다. 그의 아들이 바로 전설의 영웅 테세우스다. 테세우스는 성년이 되어 아버지가 있는 아테네로 갔다. 마침 아테네는 크레타와의 전쟁에서 패해 매년 괴물에게 바칠 공물로 7명의 처녀와 7명의 총각을 보내야 했다. 테세우스는 크레타로 건너가 모험 끝에 미궁 속의 괴물 미노타우로스(Minotaur)를 죽이고 아테네로 온다. 문제는 테세우스가 떠나기 전 아버지에게 성공하면 흰 돛을, 실패하면 검은 돛을 단다고 약속했는데, 승리에 취해 깃발 바꾸는 걸 깜빡 잊어버린 것이다. 검은 돛을 단 채로 돌아오는 배를 본 아버지는 절망에 빠져 절벽 밑으로 떨어진다. 비운의 아버지 아이게우스의 이름이 이 바다라니 기구하다.
화려한 문명과 슬픔의 역사가 공존하다
에게 해 초여름 바람을 맞으며 네 시간 만에 다다른 섬 크레타. 기대와 달리 여느 섬보다 소탈하고, 한적하다.이라클리온(Iraklion) 항구는 이 섬의 중심지와 가장 가까운 항구다.
크레타는 화려한 문명의 발상지지만 에게 해의 이름만큼 슬픈 땅이기도 하다. 크레타는 1211년부터 베네치아로부터 지배를 받았다. 베네치아인들은 항구를 바라보고 구시가지를 감싸는 역삼각형의 성벽을 쌓았다. 그 이름도 ‘베네치아 성벽(Venetian city walls)’. 도시를 에워싼 5km의 요새는 오늘날 운치 있는 경관조명을 받으며, 여행자들에게 지나간 역사를 이야기해 준다.
이후, 크레타는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는다. 1645년 크레타 전쟁 이후다. 그리고 1913년에서야 그리스 왕국에 돌아오는데, 아직도 터키계와 그리스계의 앙금은 남아있는 듯 하다.
이라클리온 구시가지 중앙에는 베니젤로 광장(Plateria Venizelou)이 있다. 이곳 출신 정치인 이름이라고 한다. 한낮의 열기를 식혀주는 반가운 물이 흐른다. 모로시니 분수(Morosini Fountain)다. 분수를 떠받치는 사자들의 모습이 단연 인상적이다. 15km 떨어진 곳에서 물을 끌어왔다고 한다.
태양이 서쪽 바다로 넘어갈 즈음이다. 다들 어디에서 있었는지 관광객과 섬사람들이 삼삼오오 항구 앞 레스토랑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에게 해 연안에서 난 과일과 해산물들이 풍성하다.
전설 속의 미궁, 크노소스 궁전(Palace of Knossos)
크레타 섬의 최고 명소는 역시 크노소스 궁전이다. 나는 어릴 적부터 역사책에 등장하는 인류문명의 발상지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설렜다. 그중의 하나가 그리스 문명보다 앞서 번창했다는 미노아 문명(Minos Civilization)*이다. 그리고 그 흔적이 바로 크노소스 궁전이다. BC 3650~BC 1170까지 융성했던 최초 유럽 문명의 발상지, 크레타 섬의 해양문명인 미노아 문명은 그리스 본토로 넘어가 미케네 문명(Mycenaean Civilization)*으로 발전됐다. 서양문명의 한 축이 이곳에서 시작된 것이다.
기원전 2700~1500년경 동안 번성한 그리스의 크레타 섬에 있었던 그리스 청동기 시대의 고대 문명. 20세기 초에 영국 고고학자 아서 에반스(Arthur Evans)에 의해 재발견되었다.
기원전 2000년경 북부 산지에서 남하한 아카이아인들이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구축한 고대 그리스의 해양 문명. 기원전 1600년경부터 크레타 문명을 받아들여 활발한 해상활동을 전개하여 기원전 1500년경에 이르러 지중해 동부의 해상권과 교역권을 모두 장악하였다.
크레타 섬의 최고 명소는 역시 크노소스 궁전이다. 나는 어릴 적부터 역사책에 등장하는 인류문명의 발상지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설렜다. 그중의 하나가 그리스 문명보다 앞서 번창했다는 미노아 문명(Minos Civilization)*이다. 그리고 그 흔적이 바로 크노소스 궁전이다. BC 3650~BC 1170까지 융성했던 최초 유럽 문명의 발상지, 크레타 섬의 해양문명인 미노아 문명은 그리스 본토로 넘어가 미케네 문명(Mycenaean Civilization)*으로 발전됐다. 서양문명의 한 축이 이곳에서 시작된 것이다.
기원전 2700~1500년경 동안 번성한 그리스의 크레타 섬에 있었던 그리스 청동기 시대의 고대 문명. 20세기 초에 영국 고고학자 아서 에반스(Arthur Evans)에 의해 재발견되었다.
기원전 2000년경 북부 산지에서 남하한 아카이아인들이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구축한 고대 그리스의 해양 문명. 기원전 1600년경부터 크레타 문명을 받아들여 활발한 해상활동을 전개하여 기원전 1500년경에 이르러 지중해 동부의 해상권과 교역권을 모두 장악하였다.
크노소스 궁전은 이라클리온 항구에서 6km 정도 떨어져 있다. 버스로도 멀지 않다. 이 궁전은 BC 1700년경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낮은 언덕산 아래로 정사각형에 가까운 형태를 갖추고 있는데, 그 당시 24,000 제곱미터로 최대 5층 높이의 건물들이 있었다고 한다. 무려 1,300여 개의 방이 있었다니,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미궁, 리비린토스(Libirinthos)가 충분히 있을 법하다.
미궁 속 괴물 이야기는 이렇다. 먼 옛날 제우스는 에우로페(Europe, 유럽이란 단어의 기원이 이 이름이다)라는 여인에 푹 빠져 그녀를 납치해, 크레타로 날아와 세 아이를 낳는다. 그 아들 중 하나가 미노스(Minoan)다. 제우스는 이후 에우로페를 크레타 왕인 아스테리온(Asterion)과 결혼시키고 자식들까지 양자로 준다. 이후, 성장한 미노스는 포세이돈에게 기도하고 황소를 얻은 후 크레타의 왕위에 오르는데, 포세이돈에게 받은 황소를 다시 제물로 바치겠다고 한 맹세를 지키지 않는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포세이돈은 미노스의 아내 파시파에(Pasiphae)가 황소와 사랑에 빠지게 만든다. 왕비는 왕궁의 설계자이자 발명가인 다이달로스(Daedalus)에게 부탁해 나무로 황소를 만들어 매일 황소와 노니는데, 이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반인반수의 괴물 미노타우로스(Minotauros)다. 미노스는 다이달로스로 하여금 지하에 복잡한 미궁을 만들어 미노타우로스를 가두고 매년 처녀와 총각을 제물로 바친다. 이 미궁은 한 번 들어가면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다는 미로 감옥이지만 테세우스(Theseus)는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성공적으로 미로를 빠져나온다. 크레타에 도착한 테세우스에 반한 크레타의 공주 아리아드네(Ariadne)가 다이달로스에게 부탁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이달로스는 실타래의 실을 이용해 테세우스가 미궁을 빠져나올 수 있게 도왔다.
신화의 흥미진진함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다이달로스는 이 일이 발각돼 아들 이카로스(Icarus)와 함께 탑에 갇힌다. 천하의 발명가는 아들과 함께 밀랍으로 날개를 만들어 탈출을 시도한다. 하지만 아들 이카로스는 태양쪽으로 너무 높이 날아 날개가 녹으며 추락해 죽게 된다. 다이달로스는 시칠리아로 도망가지만, 나중에 미노스가 보내온 군사에 의해 죽게 된다.
이곳의 물은 10km 떨어진 곳에서 흘러온다. 그 먼 옛날에 흙으로 구운 도관(테라코타, Terracotta)이 이미 발명됐으니, 당시의 건축기술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고도 남는다. 왕의 방에는 수세식 화장실도 있었다고 한다.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곳 유적 역시 이탈리아의 폼페이처럼 지진과 화산폭발로 땅속에 묻혀있었다. 폼페이보다 훨씬 오랜, 수천 년 동안 묻혀있었던 걸 1900년 영국의 고고학자 아서 에반스(Arthur Evans)가 발굴에 성공한다. 인류의 문화유산을 세상에 선사한 또 다른 영웅이다.
신화와 현실의 차이가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실제 그리스 신화의 상당부분이 실제 유적지로 발견되었다.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일리아스>, <오디세이아>에만 전해내려 온 이야기를 독일의 하인리히 슐리만(Heinrich Schliemann)이 발굴해 고대도시 트로이가 실제 존재했음을 세상에 보이지 않았던가?
그렇게 생각을 확장해간다면 정말 이 곳에서 제우스(Zeus)가 태어났을지도 모르겠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하늘의 신 우라노스(Ouranos)와 땅의 신 가이아(Gaea) 사이에서 크로노스(Cronos)가 태어난다. 크로노스는 아버지 우라노스를 쫓아내는데 우라노스는 <너도 결국 아들에게 쫓겨나게 될 것이다>라며 저주를 남긴다. 이를 두려워한 크로노스는 나중에 아내 레아(Leah)가 아이들을 낳는 즉시 삼켜버린다. 나중에 제우스를 임신한 레아는 아이 대신 돌덩이를 주고, 아들 제우스를 크레타 섬 동굴에 숨긴다. 이 아이가 신들의 신, 제우스다. 제우스는 성장해 아버지 크로노스를 찾아가 몰래 구토제를 먹여 삼킨 아이들을 다 토해내게한다. 그들이 하데스(Hades), 헤라(Hera), 포세이돈(Posseidon), 테메테르(Demeter) 등 유명한 그리스의 신들이다. 제우스가 숨어 자랐다는 그 동굴이 크레타 섬의 딕티안(Dikteon) 동굴이다. 이라클리온 중심가에서 동남쪽으로 60km 떨어져 있다. 오늘날도 매우 신성한 동굴로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궁전의 백미는 벽에 장식된 프레스코화다. 돌고래, 소 같은 생동감 넘치는 동물들의 움직임과 다양한 남성,여성들의 모습으로 당시 문화와 생활상을 엿보게 한다.
여름의 태양은 이 곳도 예외 없이 뜨겁게 비춘다. 더위 속에서도 해설사의 설명을 듣는 관광객들이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를 찾아서
이곳에 힘들게 오게 된 이유 중 하나! 바로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 1883~1957)의 무덤을 찾아가는 것. 크레타 출신으로 <그리스인 조르바>로 세상에 알려진 작가. 그의 무덤은 이라클리온 도심에서 2km 떨어진 가장 높은 언덕 위에 있다.
베네치아 성벽 옆 마르티네고 요새(Martinego Bastion)다. 2007년, 그리스 정부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서거 50주년을 맞아 기념 주화를 발행했을 정도니 그 유명세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비지땀을 흘리며 올라간 언덕 끝, 성벽 옆 정원이다. 의외로 소탈한 무덤에 오히려 방문자가 놀랐다. 나무 십자가 하나. 그리고 묘비 하나. 그리고 돌무덤! 바로 옆 잔디 위엔 아내 엘리니 사미우(Eleni Samiou)의 묘가 있다. 좀 더 붙어있었으면 좋았을걸…
그의 소설은 1964년 미카엘 카코야니스(Michael Cacoyannis) 감독이 영화로 만들어 더 유명해졌다. 안소니 퀸(Anthony Quinn)이 자유인 조르바 역을 맡았다. 능청스럽고도 세상에 초연한 그 조르바!
그는 소설에서 수많은 조르바의’어록’을 남겼다.
에게 해에도 밤은 어김없이 찾아왔다.문명의 흔적을 둘러보면서 또다시 머릿속으로 시간여행을 한다.누군가 그랬다. 모든 것은 변한다고… 모든 것은 사라진다고…
이 환
‘유랑’을 중심주제로 오지를 탐닉하는 지구별 여행자다.
학부에서는 심리학을 공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