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돌아오니 못 보던 닭 두 마리가 있었다. 모두 벼슬이 작은 암탉이었다. 목에 줄을 매달고 수돗가 한 편에 매달려 있었다. 줄이 짧아 닭은 멀리 가지 못하고 제자리를 맴돌며 꼬꼬거렸다. 할머니는 그 옆에서 숫돌에 칼을 갈았다. 낮은 시골집 기와 너머로 하얀 구름이 보이고 햇볕은 거리낌 없이 땅을 뜨겁게 달궜다. 방학을 맞아 놀러 온 충청도 시골엔 햇빛을 받아 웃자란 옥수수와 튼실하게 커가는 풋고추, 담벼락에 매달린 애호박이 내뿜는 들뜬 풀 냄새가 진동했다. 그늘을 벗어나 조금만 뛰어놀아도 등에 땀줄기가 흘렀다. 이미 나와 동생의 얼굴은 까맣게 타서 검댕을 묻혀놓은 것 같았다. 아마 할아버지의 한 마디가 있었으리라. 저러다 더위 먹는다, 지치면 안 된다는 말을 듣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닭 두 마리를 구해 온 것이다.
“저 짝 양계장에서 알을 못 낳는다는 닭을 가지고 온 거지.”
할머니는 산 너머를 가리키며 투덜거렸다. 가지고 오려면 제대로 된 놈을 가지고 와야지 알도 못 낳고 늙은 노계(老鷄)를 값이 싸다고 가지고 오면 어떡하냐는 불평이었다. 그래도 집까지 끌고 온 닭을 되돌려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보다 키가 한 팔은 작았던 우리 둘은 그저 닭이 신기했다. 늙었지만 동그랗고 맑은 눈동자와 단풍처럼 짙은 갈색과 연갈색의 깃털, 빨갛고 작은 벼슬은 책에서만 보던 닭이었다. 도시에서 살아 있는 닭을 볼 기회는 없었다. 그런데 살아 움직이며 소리를 내고 땅을 부리로 쪼는 닭이 눈앞에 있었다. 우리는 부엌에서 쌀과 콩을 가져와서 닭에게 주겠다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그러자 할머니는 질색을 하며 손사래를 쳤다.
“닭에 똥이 찬단 말이야, 인석들아.”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얼마 후에 알게 됐다. 닭의 살아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잠깐이었다. 칼 갈기를 마친 할머니는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닭 목을 잡아 비틀었다. 닭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던 전직 대통령의 말이 생각나진 않았다. 무섭거나 징그럽지도 않았다. 단지 허리가 굽고 힘이 없으며 늘 우리에게 다정했던 할머니가 한번 머뭇거림 없이 닭 목을 비트는 모습에 놀랐고, 처음 눈앞에서 목격한 ‘죽음’에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몰랐을 뿐이다. 그러나 할머니는 우리에게 전혀 눈길을 주지 않았다. 대신 할머니는 부들거리는 닭을 붙잡고 닭목 밑으로 날카롭게 벼린 칼을 슥 하고 밀어 넣었다. 검붉은 피가 수도꼭지를 연 것처럼 흘러나왔다. 더 이상 닭 목에서 피가 나오지 않자 할머니는 부엌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물을 가지고 왔다.
“지금 바로 삶는 거에요?”
나는 닭에 뜨거운 물을 껴얹는 할머니에게 물었다. 저렇게 해서는 닭이 제대로 삶아지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래야 털이 빠지는 거야. 아이고 힘들어라. 왜 이렇게 안 뽑혀.”
할머니는 닭 겉을 뜨거운 물로 살짝 익히고 털을 뽑기 시작했다. 털 뭉치가 더 이상 뽑혀 나오지 않을 때까지 할머니의 투덜거림도 계속됐다. 내가 보기엔 살짝 잔털이 남은 듯했지만 허리를 두드리는 할머니에게 차마 그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할머니는 다시 시퍼런 칼을 들고 닭 배를 갈랐다. 닭 내장이 쏟아져 나왔다. 방금 준 쌀과 콩이 그대로 남아 있는 닭의 근위, 그러니까 모래주머니도 있었다. 길고 긴 닭의 소창과 대창(으로 짐작되는 것들)이 보였고 끈 같은 것으로 묶인 노른자들도 보였다. 닭의 난소였다.
“알이 차 있네. 다 못 낳고 죽었구먼.”
할머니는 알이 되다 만 노른자를 따로 그릇에 담으며 중얼거렸다. 닭 손질이 모두 끝났다. 할머니는 가마솥에 닭을 넣고 물을 한 바가지 부었다. 다듬어 놓은 마늘도 한 웅큼 집어 넣었다. 무거운 솥뚜껑이 스르륵 소리를 내며 가마솥 위로 올라왔다. 이제 필요한 것은 기다림이었다. 할머니는 아궁이에 불을 넣고 장작을 밀어 넣었다. 불길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구수한 연기에 몸이 휩싸였다. 할머니에게서 나는 오래된 냄새 같은 것들도 느껴졌다.
“이제 나가 놀아라. 부르면 그때 들어와.”
할머니는 아궁이 앞에 앉은 우리를 밀어내며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그러면 나와 동생은 잠자리와 매미 따위를 잡으며 한나절을 보냈다. 그때는 아무리 놀아도 힘이 빠지지 않았다. 지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태양이었다. 여름의 긴 날도 놀다 보면 아쉽게 끝이 났다. 어둑어둑한 길을 잠자리 떼와 함께 뛰다 시골집으로 돌아오면 할아버지는 사랑방에서 나와 대청마루로 향했다. 할머니는 우리 발소리에 맞춰 작은 상을 부엌에서 들고 나왔다. 동생과 나는 수돗가에서 물을 콸콸 틀어놓고 흙이 묻은 손과 발을 씻었다. 그리고 마루에 뛰어 올라갔다.
작은 상 위에는 큰 닭이 양푼에 놓여 있고 오이지 냉국, 풋고추, 열무김치가 있었다. 그리고 흰쌀밥과 닭곰탕도 한 대접 씩 놓여 있었다. 시작은 할아버지가 닭 다리를 뜯는 것이었다. 요즘 파는 닭보다 족히 두 배는 큰 닭다리가 할아버지의 입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동생과 나는 작은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닭 껍질은 두꺼웠지만 고소했다. 야들야들한 영계가 아니기에 살은 두텁고 단단했다. 하지만 무미(無味)하지 않았다. 씹을수록 속 깊은 맛이 났다. 늦은 저녁, 산에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을 마루에 앉아 맞으며 닭을 씹고 노란 기름이 뜬 닭곰탕을 마셨으며 간간이 차갑고 새큼한 오이지 냉국을 한 숟가락씩 퍼 입에 넣었다. 아삭한 열무김치도 먹고 할아버지가 맵지 않다며 한 입 베어 물고 내어준 풋고추도 먹었다. 닭 뼈가 쌓이고 밥이 줄었다. 작은 배가 통통히 불어 올랐다.
멀리 산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지고 솔개는 날개를 크게 펴고 높이 날았다. 할아버지는 닭곰탕에 소주 한 병을 비우고 얼큰한 얼굴로 우리 둘을 바라봤다. 할머니는 작은 상을 치우고 안방에 들어가 텔레비전을 켰다. 얇은 문 사이로 익숙한 여배우의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매미는 잠잠해지고 풀벌레가 울었다. 할아버지는 모기를 쫓는다며 마당에 나가 담배를 피웠다. 까만 어둠 사이로 빨간 불이 날숨과 들숨에 맞춰 폈다 졌다.
그리고 나는 어른이 되었다. 도시의 여름은 숫자다. 불쾌지수, 열대야, 습도, 온도, 이 숫자들을 보고 듣고 나서야 비로소 여름이 왔음을 확신한다. 인터넷 포털 뉴스에 뜬 ‘복날’이란 안내에 맞춰 의무감에 휩싸인 채 복달임을 하러 길을 나선다. 늙고 큰 닭은 없다. 자라다 만 병아리를 영계라는 이름으로 팔 뿐이다. 닭을 키우는 입장에서도 영계가 투입 사료 당 무게비가 가장 효율적인 시기라고 하니 수지맞는 장사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먹는 닭이 점점 작아지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닭이 나이가 들수록 클수록, 사료를 먹어도 덜 자라기 때문이다. 게다가 먹는 입장에서도 나눠 먹을 필요 없이 뚝배기에 한 마리씩 담아 나오니 편리하다. 한 시간 점심시간에 맞춰 속도전을 펼친다. 새끼손가락만한 닭 다리를 빨고 이쑤시개 만한 닭갈비를 핥는다. 여물다 만 내장은 국물 속에 흩어져 볼 길이 없다. 몸에 좋다고 하니, 먹어야 한다고 하니 먹을 뿐이다. 헛트림을 하며 사무실로 돌아오면 여름의 열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옛날에 대한 그리움은 얼마인지 알 수 없다. 이제 이 세상에 없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갈 길 없는 옛 시골. 그 모든 것은 숫자로 환산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로 작은 닭을 앞에 두고 찾아오는 슬픔은 측정할 수 없고 환산할 수 없기에 다행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