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경복궁, 어디까지 가봤니? (1)

2017/09/27

천만 인구를 자랑하는 수도 서울의 심장부에 자리 잡은 조선의 대표 궁궐. 한국에 온 외국인들이 가장 먼저 찾는 서울 관광 1번지. 바로 경복궁입니다. 사드 여파로 중국인 관광객이 많이 줄었는데도 평일이고 주말이고 경복궁은 요즘도 북적거립니다. 그만큼 나라를 대표할 만한 자랑스럽고 소중한 문화유산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경복궁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수난과 오욕으로 얼룩진 역사는 어떤가요. 곳곳에 숨어서 그 진가를 알아봐주길 기다리는 보물들은 또 어떻고요.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지요. 500년 조선왕조의 정궁(正宮)이자 법궁(法宮)인 경복궁을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수박 겉핥기식으로만 봐 왔는지도 모릅니다.

경복궁은 조선의 대표 궁궐이었을까요? 실제론 아니었습니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임금들이 경복궁에서 살았던 기간을 계산해 보면 70년이 채 안됩니다. 심지어 임진왜란으로 궁궐이 모두 불에 타버린 뒤로는 무려 270여 년 동안 폐허로 방치됐고요. 그러다 고종 4년인 1867년이 되어서야 경복궁은 옛 모습을 되찾습니다. 이 야심만만한 중건(重建) 사업을 주도한 흥선대원군은 한 술 더 떠 창건 당시의 28배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규모로 경복궁을 확장합니다. 하지만 화려했던 시절도 잠시,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제에 의해 경복궁은 말 그대로 누더기가 돼버리고 맙니다. 나라를 빼앗겼으니 국권의 상징인 궁궐인들 온전할 리가 없었지요.

광화문 앞에 서서 수난의 역사를 돌아보다

다시, 광화문 앞에 섭니다. 저리도 당당하고 늠름한 모습으로 다시 서기까지 그토록 긴 시간이 필요했다니요. 2010년 8월 15일. 시끌벅적했던 광복절 기념식에서 많은 이의 환호와 박수 속에 광화문 현판이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이제는 명실상부 어엿한 경복궁의 얼굴을 되찾았구나 싶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게 착각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 사람들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졌지요. 현판 글씨를 본 사람들은 너도나도 ‘생기 없는 죽은 글씨’라며 비난을 퍼부었고, 석 달 뒤엔 현판 곳곳에서 갈라진 흔적까지 발견됩니다.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었잖아요? 정권의 빛나는 치적으로 포장하기 위한 속도전이 빚은 일대 참사였습니다.

사실 광화문 현판 글씨의 고증 과정에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광화문 현판 글씨는 1867년 경복궁 중건 당시 공사를 총지휘한 훈련대장 임태영(任泰瑛, 1791~1868)이 쓴 겁니다. 이 현판은 6.25 전쟁 당시에 불타 없어졌지요. 그 뒤로 현판을 다시 만든 건 1968년의 일입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친필로 쓴 한글 현판이었어요. 이 현판을 2006년까지 걸어 놓았다가 광화문 복원 공사가 시작되면서 떼어냅니다. 현판을 다시 만들어야 했으니까요. 실물이 없으니 사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침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광화문 현판 복원의 근거가 될 흑백사진이 나옵니다. 1916년에 촬영한 광화문 사진의 유리원판이었습니다

광화문 현판 색깔도 잘못됐다

유리원판이란 다른 말로 유리건판(琉璃乾板, glass dry-plate)이라고도 하는데 오늘날 사진 필름에 해당하는 감광판을 뜻합니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필름이 보편화하기 전에 주로 사용된 것인데, 특히 일제강점기에 촬영된 유리원판들은 문화재 복원에 결정적인 근거 자료로 활용되고 있거든요. 광화문 현판 복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2005년 문화재청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1916년 유리원판을 디지털로 분석해 당시 현판을 70%가량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며 복원된 광화문 현판 글씨를 공개합니다.

이렇게 해서 광화문 현판을 복원해 공개한 겁니다. 하지만 볼품없는 글씨에 비난이 쏟아지고 현판 목재가 갈라져 긴급 보수를 한다, 현판을 다시 제작한다, 볼썽사나운 일들이 꼬리를 물었지요. 첫 단추를 잘못 꿰어도 단단히 잘못 꿴 셈입니다. 그런데 현판의 수난은 이게 끝이 아니었어요. 2016년 2월, 이번엔 광화문 현판 색깔이 잘못됐다는 중대한 사실이 방송 뉴스를 통해 폭로됩니다. 미국 스미스소니언협회(Smithsonian Institution) 홈페이지 자료실에서 찾아낸 사진 한 장은 문화재 당국을 충격에 빠뜨렸지요.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진인데다가, 현판 색깔을 비교적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결정적인 자료였으니까요.

분명 짙은 바탕에 밝은 글씨입니다. 수많은 광화문 사진을 봤어도 이렇게 광화문 세 글자가 또렷하게 보이면서 현판 색깔까지 비교적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사진은 없었거든요. 박물관 홈페이지의 사진 정보에는 ‘1893년 9월 이전 사진’이라고 돼 있습니다. 촬영 시기 역시 정확합니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광화문 입구에 옛 군복을 입은 수문장들이 서 있는 모습이 보이시지요? 흔히 ‘구(舊) 군복’이라 불리는 옛 군복은 1895년 칙령 제78호 발표로 육군의 복장 규칙이 새로 만들어지면서 서양식 군복으로 싹 바뀝니다. 사진이 적어도 1895년 칙령 발표 이전에 촬영됐다는 걸 알려주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인 거지요.

옛 군복을 입은 수문장들의 모습 (빨간 동그라미)

지금 이 시각에도 광화문에는 잘못된 현판이 그대로 걸려 있습니다. 하도 이리저리 얻어맞아서 그런지 문화재청도 이번엔 신중에 신중을 기할 모양입니다. 현판 색깔을 원점에서 재검토하기로 하고 추가적인 고증에다 과학적 실험까지 하겠다고 하니 말이에요. 어찌 됐든 중요한 건 하나입니다. 경복궁의 얼굴이자 조선 왕실 문화의 상징으로 오늘도 수많은 외국인 관광객이 찾는 광화문에 제대로 된 현판을 되찾아주는 일이지요. 광화문 앞에 서서 아직 끝나지 않은 수난의 역사를 더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직 본격적인 답사는 시작하지도 않았건만 경복궁으로 들어가는 발걸음은 이토록 무겁기만 합니다.

흥례문과 근정문 사이를 가로질러 흐르는 금천과 그 위에 놓인 영제교

영제교 다리 에 숨은 보물 ‘천록상’

광화문을 출발해 오른쪽으로 경복궁 매표소가 있는 너른 마당을 지나면 이제 본격적인 경복궁 답사가 시작됩니다. 흥례문을 지나 근정문으로 가려면 다리 하나를 건너야 하는데요. 궁궐 안에 발을 들여놓으려면 반드시 이 작은 냇물을 건너야 합니다. 여기부터는 신성한 왕의 영역이오, 하는 일종의 관문인 셈이지요. 지금은 물이 흐르지 않는 이 냇물을 금천(禁川), 다리를 금천교라 합니다. 경복궁의 금천교는 예로부터 영제교(永濟橋)란 이름으로 불렸다 하네요. 관광객들은 대부분 이 다리를 대수롭지 않게 그냥 지나쳐 버립니다. 대개는 눈높이 위를 바라보기 때문이지요. 화려한 궁궐 건물에 시선을 빼앗기는 겁니다.

영제교 왼쪽과 오른쪽에 보이는 천록. 북서쪽 천록은 혀를 내민 모습입니다.

다리 양옆을 자세히 봅니다. 딱히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를 돌짐승 네 마리가 석축 위에 턱을 괸 채 물길을 뚫어져라 내려다보고 있군요. 앞만 보고 가는 이들에겐 잘 눈에 띄지 않는 뜻밖의 보물입니다. 한눈에 봐도 아주 영험한 동물이란 걸 금방 알아차릴 수 있지요. 자세히 들여다보면 표정이 아주 재미납니다. 심지어 한 녀석은 혀를 날름 앞으로 내밀고 있군요. 사납고 험상궂은 모습이 아니라 익살스럽고 친근한 얼굴이에요. 조용하고 엄숙한 궁궐이란 공간에 작은 숨통을 틔워주는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해주고 있습니다. 이 상상 속의 동물을 옛사람들은 천록(天鹿)이라고 불렀답니다.

이 예사롭지 않은 조각상은 경복궁 창건 때부터 있었던 것이라고 해요. 그만큼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귀한 유물입니다. 일제가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다른 곳으로 옮겨놓았다가 경복궁을 복원하면서 제자리를 찾았지요. 다리 양옆의 석축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새로 만들어야 했는데, 천록 네 마리는 훼손되지 않았으니 이 또한 작은 기적이라 할 만합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저자 유홍준 교수도 이 천록상의 문화재적 가치를 높게 평가하며 답사기 제6권 경복궁 편에 꽤 비중 있게 다뤄놓았습니다. 이렇게 숨은 보물을 하나씩 찾아내고 알아가다 보면 답사하는 재미는 물론 그 의미까지도 한층 풍성해집니다.

국보 제223호로 지정된 경복궁 근정전

거칠고 투박해서 더 아름다운 ‘박석’

영제교를 건너 근정문을 지나면 마침내 경복궁의 심장으로 불리는 근정전(勤政殿, 국보 제223호)이 그 화려하고도 웅장한 위용을 드러냅니다. 사실 경복궁 하면 근정전이지요. 경복궁이란 무대의 공식적인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근정전입니다. 경복궁에서 사람이 가장 많은 곳도, 가장 오래 머무는 곳도 바로 이곳이지요. 너도나도 건물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느라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다시 눈높이 이야기를 해볼까요. 근정전 앞에 이르면 누구나 고개를 들어 건물이 주는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관찰하고 감상합니다. 그리고 멋지게 사진 한 장 박으면 끝. 관광객들은 여기서 대개 발길을 돌립니다.

근정전 앞마당에 깔려 있는 박석

근정전 일대를 가장 멋있게 찍을 수 있는 촬영 장소는 어디일까요? 바로 근정문 양 옆으로 붙은 행각 끝 모서리입니다. 이곳에 서서 초점을 맞추면 근정전이 왜 아름다운지 대번에 알 수 있지요. 땅바닥으로 카메라를 바짝 내려서 찍으면 더 끝내줍니다. 여기에 한몫을 하는 게 바로 근정전 앞마당을 빼곡하게 메우고 있는 납작한 돌덩이들입니다. 두께가 얇고 넓적하다고 해서 박석(薄石)이라고 부르는데요. 위에서 내려다본 생김새가 저마다 천차만별인데다, 표면도 고르지가 않고 울퉁불퉁합니다. 게다가 돌과 돌 사이에 드문드문 잡초까지 자라 있으니 이게 도대체 궁궐 관리를 제대로 하는 건가, 혀를 끌끌 차는 분들도 있다는군요.

그런데요, 반대로 이렇게 생각해봅니다. 만약 저 돌들을 가로 세로 반듯하게 자르고 표면까지 매끄럽게 다듬어서 빈틈없이 깔아놓았다면 어땠을까요. 지금보다 더 깔끔해 보이기야 할 겁니다. 하지만 그런 인공적인 아름다움은 사실 궁궐이란 공간에는 잘 어울리지 않지요. 조선의 석공에게 돌 깎고 다듬는 기술이 없어서 그랬을까요. 아닐 겁니다. 저 우툴두툴 불규칙한 돌들의 어울림이 주는 자연스러운 맛은 절대로 자로 잰 듯 잘라서 얻어질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박석이 넓게 잡히도록 구도를 잡아 근정전을 사진에 담으면 탁 하고 무릎을 치게 되는 바로 그 장면.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아름다움의 극치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근정전 월대를 수놓은 또 다른 보물 ‘석상’

이렇게 멀찍이서 근정전의 아름다움을 한껏 눈에 담은 뒤, 이제 관람객들 틈에 섞여 근정전으로 향합니다. 그런데 앞에서도 말씀드렸듯 사실 근정전이란 주인공 곁에는 근정전을 더 돋보이게 해주는 빛나는 조연들이 있어요. 바로 근정전을 떠받치고 있는 돌 축대 사방에 고개를 내밀고 있는 갖가지 조각상들입니다. 상월대, 그러니까 위쪽 월대의 동서남북에는 사방을 지키는 수호신인 청룡, 백호, 주작, 현무가 새겨져 있고, 그 사이와 아래쪽 월대에는 십이지 동물들이, 그리고 월대의 끝 모서리에는 똑같은 얼굴을 한 상서로운 짐승이 올라앉아 있습니다. 하나씩 일일이 세어보니 자그마치 40마리나 되더군요.

근정전 남쪽 월대 모서리 아래 위에 있는 석견상

그중에서도 유독 어느 미술사 학자의 눈길을 사로잡은 동물이 있었습니다. 근정전을 정면으로 바라볼 때 양옆모서리에 꼭꼭 숨어 있는 돌 짐승들이지요. 앙증맞은 표정을 한 사자 새끼 두 마리가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고, 저 위를 쳐다보면 사자 어미가 떡 하니 앉아서 새끼들을 보듬고 있는 모습도 보입니다. 사신상이나 십이지신상은 그렇다 해도 이 녀석들은 또 뭔가 싶어 호기심이 절로 일어나지요. *수헌거사(樹軒居士)는 『춘성유기(春城遊記)』에서 이 사랑스러운 동물들을 석견(石犬)이라 불렀는데요. 답사기의 저자 유홍준 교수가 반했다고 했던 보물 중의 보물입니다.

*수헌거사(樹軒居士) : 유득공(柳得恭)의 아들 유본예(本藝)로 추정된다. 주요 편찬 서적으로 서울의 사적을 정리한 『한경지략(漢京識略)』이 있다. 

사실 건물이 중요하긴 해요. 그런데 경복궁을 두 번 세 번 자꾸 가서 보면 오히려 그동안 전혀 눈에 띄지 않던 것들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합니다. 근정전 월대를 산책하듯 돌면서 한 마리 한 마리 짚어가며 이건 호랑이, 이건 원숭이, 이렇게 맞혀가는 재미가 남다르거든요. 돌덩어리에 불과하다 여길 수도 있지만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 보다 보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끌리고 정이 들기 시작합니다. 차가운 돌덩어리에서 온기가 느껴진다고 할까요. 저 동물들을 괜히 만들어서 두었을 리가 없지요. 덕분에 지엄하기 이를 데 없는 궁궐이 지금 우리에게 한결 친숙하게 다가오는 것일 테고요.

근정전 양옆에 놓여 있는 세 발 달린 솥

세 발 달린 솥은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이제 근정전과 작별해야 할 시간입니다. 하지만 발길을 돌리기 전에 소개해드리고 싶은 보물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근정전의 양옆에 있는 금속으로 만든 솥 이야기인데요. 조금 안다는 분들도 이 솥을 향로로 알고 계신 경우가 많더라고요. 실제로 솥 안을 들여다보면 흙을 반쯤 담아놓기도 했으니 말이에요. 아무리 생각해도 국가의 중요한 행사 때 향을 피우는 그릇이 아니었을까 흔히 짐작들을 하는 거지요. 제게는 사실 관람객들이 대부분 그냥 지나치고 마는 이 솥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몇 달 전 현충사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현충사 사당 양옆에 모양도 크기도 비슷한 솥이 놓여 있었거든요.

이걸 뭐라고 부르나 찾아봤더니 정(鼎)이라 합니다. 정은 다리 세 개 달린 솥을 가리키는데요. 도대체 용도가 뭘까요? 백방으로 자료도 뒤적거리고 궁궐과 고문헌 전문가들에게 직접 자문도 구해봤습니다만 안타깝게도 딱 부러지는 답은 못 얻었습니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를 분명하게 알려주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지요. 다만 이 물건이 중국에서 유래했다는 것만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중국 측 사료를 보면 아홉 정의 전설, 이름 하여 구정(九鼎)의 전설이라는 게 전해지는데요. 내용인즉슨 중국 고대 주나라 시절에 9개 주의 금속을 모아 정 9개를 만들어서, 통치권을 넘겨줄 때 왕권을 상징하는 보물로 함께 넘겨줬다는 겁니다.

대한제국의 정궁이었던 덕수궁 중화전 앞에 있는 정(鼎)

궁궐에 깃든 것은 다 이유가 있으니…

다시 말해 정(鼎)은 정통 왕조, 임금의 권위를 상징하는 궁궐 장식물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궁궐마다 다 있는 게 아니라, 조선왕조의 정궁이었던 경복궁과 대한 제국의 정궁이었던 덕수궁 딱 두 곳에만 있습니다. 결국 지금으로선 향로로 간주할 이유가 전혀 없는 거지요. 당연히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사당인 현충사에 둘 이유도 없고요. 왕권을 상징하는 궁궐 유물이니까요. 현충사뿐 아니라 전국 곳곳의 사당에서 이렇게 정(鼎) 2개를 설치해 놓고 제사용 향로로 쓰고 있습니다. 틀렸습니다. 향로라면 하나를 쓰는 게 맞지요. 과거 어떤 기록을 살펴봐도 향로를 좌우 쌍으로 두고 쓴 사례는 없었거든요.

안타깝게도 궁궐을 좀 안다는 전문가들의 책을 아무리 뒤져봐도 이 부분을 명쾌하게 정리해놓은 것이 없더라고요. 저 역시 전문가가 아닌 입장에서 할 수 있는 데까지 찾아보고 물어보고 해서 내린 결론은 적어도 향로는 아니다, 라는 겁니다. 게다가 오직 경복궁 근정전과 덕수궁 중화전에서만 볼 수 있는 유물이잖아요. 그만큼 뭔가 깊은 뜻이 담겨 있으리라 짐작만 할 뿐 누구 하나 속 시원하게 설명을 해주지 않았으니 말이에요. 혹 근정전에 가시거든 이 진귀한 유물에도 한 번쯤 눈길을 주시면 어떨까요. 오랜 세월 궁궐 안에서 살아온 것들은 무엇 하나 이유 없이 그 자리를 지켜온 게 아니니까요.

다음 화에 계속됩니다▶

 

김 석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KBS기자.
부족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전국의 문화유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문화 예술 분야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