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제가 돼지를 가깝고도 먼 동물이라고 했을까요. 이유는 이렇습니다. 옛 그림을 감상하고 공부하면서 저는 특별히 ‘동물’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왔습니다. 옛 그림에서 동물을 찾으면 학창 시절 생물 수업 시간에 배운 어류-양서류-파충류-조류-포유류 분류법에 따라 목록을 만들어서 정리를 해놓는 거죠. 옛 그림에는 정말 온갖 동물들이 다 있습니다. 한데 워낙에 보기 힘든 동물들이야 그렇다 쳐도 돼지 그림은 정말 드뭅니다. 이상하죠?
왜 그럴까, 이유를 따져봤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인간과 가장 가깝게 지낸 동물로 크게 네 종류가 있지요. 개, 소, 닭, 그리고 돼지입니다. 이 중에서도 개와 소, 닭은 옛 그림에 굉장히 많이 보입니다. 제가 2017년 이맘때 닭을, 작년엔 개를 묘사한 옛 그림을 소개해 드린 적이 있는데, 그때는 재료가 차고 넘쳐서 쓸 그림을 선별해야 할 정도였어요. 그런데 돼지는 아무리 뒤져봐도 옛 그림에서 보이지 않더라는 겁니다.
▍2018년 무술년 개 이야기, 2017년 정유년 닭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옛 그림에 돼지가 안 보이는 까닭은?
그래서 제 나름대로 추측을 해봤지요. 네 가지 동물 다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이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돼지에게만 없는 건 뭘까. 개와 소, 닭은 각기 인간에게 이로움을 주는 장기를 하나씩 갖고 있습니다. 개는 짖어서 집을 지켜주고, 소는 힘들여 밭을 갈아주고, 닭은 울어서 새날을 알려주죠. 그런데 돼지는 아무 재주가 없어요. 먹고 싸고 자는 게 전부니까요. 그래서 옛 화가들이 유독 그렇게 돼지에게만은 인색했던 걸까 싶기도 합니다.
김준근 <산제>, 종이에 수묵, 23.2×16.0cm,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그래서 더욱 이 그림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답니다. 조선 시대 유일의 돼지 그림이라고 하면 과장이겠지만, 돼지를 주인공으로 그린 조선 시대 유일의 그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이 작품은 조선 말기의 화가 기산 김준근(金俊根, 미상)의 <산제>입니다. 멧돼지 두 마리가 사이좋게 내달리는 장면을 그렸어요. 등에 날카로운 털이 수북한 것이나 날카로운 어금니를 보더라도 영락없는 멧돼지입니다.
김준근이라는 화가는 베일에 싸인 인물입니다. 언제나 태어나고 언제 돌아갔는지 남아 있는 기록이 없거든요. 조선 말기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기에 대표적인 개항장이었던 원산을 근거지로 그림을 그려 팔았다는 정도만 알려져 있을 뿐이지요. 생애에 대해선 알려진 게 없는데, 특이하게도 김준근의 그림은 전 세계에서 무려 1,800점이 넘게 확인됐습니다.
외국인들의 방문이 활발해지던 시기에 김준근은 조선 풍속화를 그려 팔았습니다. 그렇게 판매한 그림들이 훗날 세계 각국의 박물관에 소장되면서 이 물음표 같은 화가의 이름은 국제적(?) 명성을 얻게 됐지요. 그래서 김준근의 그림을 ‘수출 풍속화’라 부르고, 김준근을 ‘미술 한류의 원조’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제가 아는 한 김준근의 <산제>는 돼지가 주인공인 조선 유일의 그림입니다.
▍동물 그림의 ‘끝판왕’ <수렵도>와 <호렵도>
그래도 설마 이게 끝은 아니겠지 하던 차에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죠. 혹시 사냥하는 모습을 담은 그림에 멧돼지가 있지 않을까? 조선 시대에는 사냥 그림이 꽤 많이 그려졌습니다. 그중에서도 <수렵도>, <호렵도>는 동물 그림의 ‘끝판왕’이라 할 만큼 갖가지 동물들이 그야말로 총출동합니다. 물론 여기서 멧돼지가 빠질 리 없고요.
<수렵도 12폭 병풍>, 조선 17세기 후반~18세기 전반, 비단에 수묵채색, 각 132×52cm
조선 후기의 12폭짜리 병풍 수렵도의 가장 오른쪽 제1폭입니다. 가운데 말 탄 사냥꾼이 시커먼 네발짐승을 향해 창을 내리꽂는 모습이 보이지요. 어떤 동물 인가 했더니 멧돼지였습니다. 이 병풍의 세 번째 폭에도 사냥꾼을 피해 달아나는 멧돼지 한 마리가 그려져 있습니다. 누군지 몰라도 이 정도면 꽤 실력 있는 화가가 그렸을 겁니다.
<호렵도 8폭 병풍>, 조선 19세기, 종이에 채색, 78.5×351cm
그보다 훨씬 뒤에 그려진 이 병풍에도 멧돼지가 등장하는데요. 세 번째 폭을 보면 사냥꾼의 화살을 피해 달아나는 짐승들이 바로 멧돼지입니다. 이번엔 세 마리가 떼로 도망치고 있군요. 위의 <수렵도>에 비하면 수준이 좀 떨어지지만, 쫓고 쫓기는 팽팽한 긴장감을 해학으로 승화시킨 화가의 재치가 돋보입니다. 조선 후기에는 <수렵도>나 <호렵도>가 유행했으니 굳이 확인해보지 않아도 대부분 멧돼지가 그려져 있을 겁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확인합니다. 옛 그림에 등장하는 돼지는 모두 ‘멧돼지’라는 것을요. ‘집에서 기르는 돼지’는 없습니다. 먹고 싸고 자는 것밖에 몰라서 안 그린 게 아니라는 거예요. 만에 하나 어딘가에 집돼지가 숨어 있다면? 글쎄요. 그런 게 있었다면 진즉에 알려졌겠죠. 먹고 싸고 자는 게 특기인 집돼지는 그림의 모델이 된 적이 없습니다. 조선 시대 이전 그림이나 유물에 등장하는 모든 돼지는 100% 멧돼지입니다.
▍문헌 기록에 담긴 이런저런 돼지 그림
해마다 이맘때면 꼭 찾아가 보는 박물관이 있습니다. 경복궁 안에 있는 국립민속박물관이에요. 어느 해부턴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열리는 띠 동물 전시 때문이랍니다. 돼지 그림을 워낙 찾기가 힘들다 보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올해도 가봤죠. 하지만 역시나 새로운 그림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당사주》에는 띠 동물 그림과 함께 그에 해당하는 점괘가 적혀 있습니다.
다만 돼지를 그린 흥미로운 책이 보이더군요. 당사주(唐四柱)라 해서 사람의 사주를 토대로 운세를 풀이한 책인데, 여기에 돼지띠 점괘를 풀이하면서 돼지 그림을 그려놓았습니다. 그냥 봐도 그림 수준은 상당히 떨어지긴 합니다만, 똑같은 돼지를 참 다르게도 그려놓은 것이 보고 있으니 절로 웃음이 나오더군요. 심지어 맨 오른쪽 것은 돌돌 말린 꼬리가 아니었다면 무슨 동물인지 알 수조차 없습니다.
이의조 《가례증해 家禮增解》, 1792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그런가 하면 돼지를 부위별로 설명해놓은 특이한 그림도 있답니다. 조선 후기의 학자인 이의조(李宜朝, 미상)가 주자의 《가례(家禮)》를 보충해서 쓴 《가례증해(家禮增解)》란 책에 이런 그림이 실려 있더군요. 요즘 정육점에 가면 볼 수 있는 부위별 고기 설명서와 비슷하지요. 조선 시대에 제사 지낼 때 돼지고기의 어떤 부위를 쓰고, 어디에 어떻게 올려놓는지 설명한 내용입니다. 다른 데선 보기 힘든 그림이에요.
<시정 豕鼎>, 조선시대, 높이 37.4cm,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제사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돼지고기는 심지어 담은 그릇도 따로 있었더군요. 놋쇠로 만든 이 그릇의 이름은 <시정>입니다. 풀이하면 ‘돼지 솥’이에요. 뚜껑에 돼지 시(豕) 자가 새겨져 있지요. 상당한 위엄과 격조가 엿보이는 이 그릇은 종묘 제례에서 삶은 돼지를 담은 그릇으로 쓰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몸체를 지탱하는 세 발의 모양마저 돼지입니다. 이런 곳에 돼지가 숨어 있을 줄이야.
▍돼지는 본디 인간의 수호신이었다!
조선 왕실의 가장 크고 중요한 제사였던 종묘 제례에 돼지 모양 그릇이 쓰였다! 여기서 돼지는 ‘신성성’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그저 먹고 싸고 자는 집돼지가 아니라 멧돼지라면 그럴 만도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 저 지체 높은 궁궐 지붕 위에 올라앉아 망을 보고 있을 수 있는 거 아닐까요. 궁궐에 가면 지붕 위에 까만 조각상이 줄지어 있는 걸 볼 수 있지요. 잡상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경복궁 경회루 추녀마루의 저팔계 잡상
잡상은 궁궐 건물을 지키는 수호신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지녔습니다. 궁궐마다 잡상의 개수나 배열 형식은 조금씩 다릅니다. 같은 궁궐이라도 건물에 따라 또 다르고요. 하지만 일반적인 순서는 맨 앞에 있는 것이 저 유명한 《서유기》의 삼장법사, 그 뒤가 손오공, 그리고 다음 선수가 바로 저팔계예요. 돼지입니다. 고개를 뒤로 젖힌 모습이 특징이지요. 잡상이 11개로 가장 많다고 알려진 경복궁 경회루 지붕에는 저팔계가 두 개입니다.
불국사 극락전 앞과 처마 밑의 돼지는 어느 돼지띠 해에 화재예방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전해집니다.
이게 궁궐에만 있었느냐? 유서 깊은 사찰에서도 돼지를 만날 수 있습니다. 경주 불국사 극락전 앞에 놓인 황금돼지를 본 적 있으신가요? 마침 올해가 황금돼지다 뭐다 해서 요란하게들 떠들더군요. 돼지가 뜬금없이 왜 사찰 마당에 떡 하니 앉아 있을까요.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화재가 워낙 걱정이 되다 보니 어느 돼지띠 해에 만들어서 저렇게 ‘화재 예방’을 상징하는 의미로 두었답니다.
그런데 불국사에는 돼지 한 마리가 더 있습니다. 불국사 극락전 처마 밑에 저렇게 돼지가 꼭꼭 숨어 있었더군요. 제아무리 불국사를 많이 가본들 처마 밑까지 샅샅이 살피지 않는다면 저 돼지를 어떻게 찾아내겠어요. 불에 대한 염려가 얼마나 컸으면 저렇게까지 했을까 싶습니다. 여기서 확인한 사실, 돼지는 불을 막아주는 존재로 여겨졌다는 겁니다. 화재로부터 절을 지켜주는 수호신이었던 거죠.
▍풍성하고 넉넉한 한 해가 되길 바라며
이렇듯 유교 문화에서건 불교 문화에서건 돼지가 ‘인간의 수호신’으로 여겨진 건 아주 오래전부터였답니다. 나쁜 기운으로부터 궁궐을 보호하고, 화마(火魔)로부터 사찰을 지키는 신성한 존재로 인식돼온 것이죠. 하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그런 의미를 찾기 힘들어졌어요. 도리어 천덕꾸러기 신세가 돼버렸죠. 실제로 얼마 전엔 멧돼지가 사람을 해친 사건도 있었으니까요.
그럼에도 사람들은 지금도 돼지 저금통에 한 푼 두 푼 동전을 모읍니다. 저금통이 가득 차서 잔뜩 배가 부르면 그만큼 풍요와 행운이 깃들 거라 믿고 싶은 마음 때문이겠지요. 게다가 돼지꿈은 좋은 꿈이라고도 하잖아요. 해가 바뀐다고 해서 사는 일이 벼락처럼 좋아지는 건 아닐 테지만, 새해에는 부디 몸도 마음도, 또 기왕이면 주머니 사정도 퉁퉁하고 튼실한 돼지처럼 넉넉해지길 마음속으로 빌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