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업원이 테이블을 흘깃 봤다. ‘왜 아직도 다 먹지 않았냐’는 무언의 메시지가 전해졌다. 시간은 저녁 9시 무렵이었다. 가게 영업시간은 오후 10시까지라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종업원들은 이미 몸이 붕 뜬 듯 서로 떠들며 잡담을 했다.
그곳은 오래된 가게, 노포(老鋪)였다.
“이래가지고는….”
나도 모르게 얼굴이 굳어졌다. 음식을 다 먹지 않고 나왔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뒷맛이 썼다.
낙원동과 익선동에는 이른바 ‘레트로’의 바람이 가장 거세게 몰아치고 있다. 1920~30년대 경성 건축왕이라고 불렸던 ‘정세권’이 개발하고 분양한 근대형 한옥 주택들은 여전히 낮은 키에 웅크렸다. 여전히 사람이 머무는 곳도 있지만, 태반이 뜯어고쳐 카페와 디저트 가게, 혹은 주점으로 형태를 바꿨다. 그 끝 무렵, 낙원상가로 이어지는 골목에는 ‘호반’이 있다.
▍빛 바랜 골목의 40년 명성 ‘호반’
1961년 장사를 시작한 호반은 여러 차례 가게 자리를 옮겼다. 규모를 확장하기도 하고 개발 계획에 밀려 나가기도 했다. 그러다 2015년 6월에 잠시 문을 닫았다. 40년 넘게 가게를 이끌던 주인이 은퇴한 것이다. 1974년 호반에 들어와 막내 생활을 했던 지금의 주인장이 그 간판을 넘겨받았다. 그리고 그해 10월에 낙원동에 문을 열었다.
이 집은 본래 이북음식을 전문으로 했다. 간간하게 맛이 오른 대창 순대, 선이 똑 떨어지는 수트처럼 잡내 하나 없이 삶아낸 우설을 먹으면 그 맥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 집을 이북음식에 한정 짓기에는 그 스펙트럼이 좁지 않다. 통통한 낙지를 살짝 매콤하게 볶아 참기름 조금 뿌려 또아리를 튼 소면을 곁들여 먹을 때, 직접 만든 두부를 밑에 깔고 감자, 무, 애호박을 올린 뒤 도톰한 병어를 센 불에 졸여낸 병어조림을 숟가락으로 퍼먹을 때, 찬 바람 부는 서해에서 올린 자잘한 강굴의 바닷내음을 느낄 때, 짤막한 한 줄로 소개할 수 있는 식당이 아닌 눈물과 땀이 흐르고 사랑과 우정이 맺힌 한 권의 긴 소설을 읽는 듯한 기분이 든다.
가게를 막 옮겼을 때는 휑한 빈자리에 마음이 쓰였으나 이제 예약을 하지 않고서는 자리 잡기가 쉽지 않게 되어 버렸다. 젊은이와 노인이 모두 함께 떠들고 노는 드문 집이다. 단품으로 보면 저렴하지 않지만 들어간 재료의 단가를 안다면 비싸다는 말을 할 수 없다. 손님을 하대하지 않고 늘 웃는 낯으로 대하는 것도, 시계처럼 정확한 맛을 유지하는 것도, 이 집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들이다.
▍노객들의 손때가 묻은 곳 ‘OB낙원호프’
호반이 배를 가득 채우는 곳이라면 ‘OB 낙원호프’는 마른 목을 축이는 곳이다. 호프집이라고 하여 우습게 볼 개재가 아니다. 이 집의 역사도 40년을 넘는다. 그 시간의 길이는 가게 안으로 들어가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
폭이 60cm 정도 되는 좁고 긴 나무 탁자가 학교처럼 세 줄로 늘어선 이 집에는 늘 낙원동과 인사동에 머무는 노객(老客)들이 가득 찬다. 붓을 들고 소리를 내어 생계를 유지하는 이들도 이 집의 단골이다. 길가에 선 별 것 없는 호프집이지만 맥주 한잔을 시켜 목구멍으로 흘러내리면 새로운 세상이다. 열대과일 향이 살짝 풍기는 상쾌한 생맥주는 본래 마시던 맥주 맛이 맞는지 의심하게 한다. 종업원에게 물으면 그저 ‘관리를 잘해서’라고 말하며 살짝 웃고 만다. 그러면 그 맛을 확인하려고 다시 또 한잔을 시키게 된다.
안주라고 치면 흔한 마른안주 등속이 전부다. 그러나 나무 그릇에 담긴 마른안주나 손수 구워주는 스팸을 시켜놓으면 상이 가득 차지 않아도, 캐비어니 푸아그라니 하는 것들로 값을 치르지 않아도 가슴이 가득 찬다. 그 뒤로 노란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조약돌 던지듯 서로 말을 톡톡 던지면 늘 바쁘게 흘러가는 시간은 작은 구름처럼 잠시 멈춰 지친 몸을 누인다.
▍90년대의 추억이 흐르는 LP뮤직바 ‘라커스’
만약 밤이 깊다면, 만약 날이 춥다면, 음악을 들으며 몸을 녹이고 갈 곳 없는 마음을 쉬게 하고 싶다면 종로2가 ‘라커스’에 가야 한다. 오래전 흔했던 LP판을 틀어주는 이른바 ‘뮤직바’인 라커스는 1999년 문을 열었다. 스스로를 ‘디제이’라고 칭하는 주인장은 신청곡을 받지만 LP와 CD로 가진 음악만 튼다. 어차피 인터넷 연결이 되어 있지 않아 없는 곡을 틀 방법도 없다.
이곳에 오는 사람은 근처 어학원의 학생들, 어학 강사 외국인들, 회사원들, 단골이라고 칭하는 중년들, 이제 막 단골이 된 20대 등 종잡을 수 없는 무리가 이 집에 드나든다. 이곳을 노포라고 부르기에는 연식이 길지 않지만 이런 종류의 술집이 도심 한복판에 남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도감이 든다.
안주라고 부를 것은 별로 없다. 그저 마른 옥수수를 씹으며 맥주나 위스키 따위를 시켜 마신다. 그러다 옛날 아버지가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짐빔’을 즐겨 마셨다는 이야기가 떠오르면 ‘짐빔 콕’ 같은 것을 시키게 된다. 캐러멜의 진한 단맛, 옥수수로 빚은 버번 위스키의 희미한 단맛이 겹쳐 쌓인다. 차갑고 달달하며 독한 액체가 몸으로 퍼져 나간다. 나의 아버지가 마셨고 취했던 그 술이다. 20년 전에도 30년 전에도 듣던 음악이 허공에 맴돈다. 눈을 감고 앞으로만 달려가던 몸이 멈춘다. 쌓인 시간 위에 앉아 작은 잔을 만지작거린다. 오래전 그때처럼, 그 사람처럼, 오래된 가게에서.
신세계프라퍼티 리징 2팀 정동현 셰프
신세계프라퍼티 리징 2팀에서 ‘먹고(FOOD) 마시는(BEVERAGE)’일에 몰두하고 있는 셰프,
오늘도 지구촌의 핫한 먹거리를 맛보면서 혀를 단련 중!
저서로는 <셰프의 빨간 노트>, <그릇을 비우고 나면 많은 것이 그리워졌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