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전이었던가요. 점심시간을 이용해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았습니다. 경험상 그 시간엔 관람객이 늘 적었거든요. 실패할 일이 없을 것이었죠. 그런데 주차장에서부터 예상은 무참히 빗나가 버렸습니다. 평일 오전에 주차할 자리가 없더라는 겁니다. 놀라운 건 그 다음이었죠. 박물관 입구에 기다리는 줄이 수백 미터나 되더군요. 세상에 이런 일이!
하루가 멀다 하고 박물관에 가는 제게 그날따라 그 기나긴 줄이 어찌 그리 낯설어 보이던지…. 그때서야 떠올랐습니다. 아차, 방학이었구나. 후회해도 이미 소용없는 일이죠. 평일 낮이 한가하리란 계산에 방학이란 결정적 ‘변수’가 고려되지 않았던 겁니다. 완벽한 계산 착오. 게다가 덥기는 얼마나 더웠던지. 줄줄 흘러내리는 땀을 훔치며 그대로 발길을 돌리고 말았습니다.
▍최초 공개되는 조선 중기 산수화 명작
사설이 좀 길었네요. 어쨌든 그 뒤에 다시 날을 골라 박물관에 갔을 땐 다행히(!) 관람객이 좀 적더군요. 본격 휴가철이어서 그랬을 겁니다. 제가 이렇게까지 발품을 판 이유는 절대 놓쳐선 안 될 아주 중요한 전시회 때문이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마련한 특별전 ‘우리 강산을 그리다: 화가의 시선, 조선시대 실경산수화’입니다.
무엇보다 근래 보기 드문 산수화 전시입니다. 유물만 360여 점이에요.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를 포함해 조선을 대표하는 화가들의 숱한 걸작들이 망라됐습니다. 최근에 이런 규모의 산수화 전시가 없었거든요. 그러니 일단 ‘갈증해소’에 그만이죠. 게다가 교과서에서나 보던 그림들이 무더기로 나왔습니다. ‘안구정화’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죠.
그런데 사실 제가 이 전시회를 굳이 애써 찾아가 보려 했던 데는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조선 중기에 그려진 산수화 두 점이 처음으로 전시장에 나왔다는 거였죠. 게다가 실제 경치를 담은 그림이라고 했습니다. 조선 중기 산수화는 워낙 드문데 심지어 실경을 그렸다고? 호기심이 대폭발합니다. 열 일 제쳐놓고 무조건 달려가 볼 수밖에요.
전시장 입구에 나란히 걸린 <경포대도>와 <총석정도>
전시장 초입에 나란히 걸린 두 작품. <경포대도>와 <총석정도>입니다. 워낙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이 많다보니 이 두 작품은 상대적으로 그리 큰 관심을 받지는 못하는 것 같더군요. 전시 해설문을 꼼꼼하게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더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2019년에 윤익성·윤광자 두 분이 기증한 이 작품의 해설문은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1557년 금강산과 강원도 지역을 유람한 후 제작한 경포대와 총석정 그림이다. 현존하는 강원도 지역 실경산수화 가운데 가장 연대가 올라가는 작품으로서 최근 기증을 받아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경포대도>는 화면 하단의 죽도, 강문교에서 상단의 경포대와 오대산을 올려다보는 구도로 그렸는데, 이는 18세기 이후 제작된 경포대도의 구도와 상반된다. <총석정도>에서는 돌기둥 아랫부분은 희게, 윗부분은 검게 칠해 상승감을 고조시키고 돌기둥 사이로 물결을 그려 경물 간의 깊이감을 표현하였다.>
이 글이 알려주는 중요한 정보들을 다시 정리해보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1557년에 강원도의 실제 경치를 보고 그렸다, 현재 전하는 강원도 실경산수화로는 가장 오래된 그림이다, 기증을 받아 처음으로 대중에게 공개한다는 점을 차례로 강조해 놓았군요. 임진왜란 이전 그림이 이렇게 온전하게 잘 남아 있다는 사실이 일단 놀랍습니다. 게다가 실제 경치를 보고 그린 실경산수화가 조선 중기에 제작됐다는 점도 퍽 이례적이죠.
작가 미상 <총석정도>, 조선 16세기 중반, 축, 비단에 엷은 색, 101.0×54.5cm, 2019년 윤익성․윤광자 기증
두 그림 가운데 특히 <총석정도>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이 그림은 금강산 일대 풍경을 그린 것으로는 현재 남아 있는 그림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예술성 또한 뛰어나죠. 처음 이 그림을 본 순간 과연 조선시대 그림이 맞나 싶을 정도로 감각적인 묘사가 돋보이더군요. 금강산을 유람하며 총석정을 그린 조선의 화가는 여럿이었지만, 이런 파격적인 구도로 총석정을 그려낸 화가는 없었으니까요.
노란 사각형 안에 통천총석정(通川叢石亭)이라 적혀 있습니다.
그림을 자세히 살펴볼까요. 오른쪽 상단 모서리에 깨알 같은 글씨로 통천총석정(通川叢石亭)이라 써놓았습니다. 무엇을 그렸는지 분명하게 밝힌 겁니다. 화면 왼쪽 아래로 비스듬하게 시선을 옮기면 제법 긴 글이 적혀 있습니다. 이런 형식의 글을 발문(跋文)이라고 하는데요. 그림을 그린 경위를 적어놓은 겁니다. 풀어 옮기면 이런 내용입니다.
나는 정사년(1557, 명종 12) 봄에 홍(洪)군 덕원(德遠)과 관동(關東) 지방을 유람하기로 약속을 하고는 금강산과 대관령 동쪽의 뛰어난 풍광을 두루 다 관람할 수 있었으니, 그곳의 높고도 빼어난 봉우리와 깊고도 그윽한 골짜기며 천태만상의 구름과 산 기운, 아득히 넘실대는 호수와 바다를 모두 다 유산록(遊山錄) 속에 들여놓고는 때때로 펼쳐보곤 하였지만, 속세의 인연이 이내 몸에 얽혀 있고 서울에서 벼슬살이하다 보니, 자연의 진짜 참모습은 한갓 꿈결에서나 떠올려볼 뿐이었다. 매번 옛사람들이 산수 속에 구름처럼 누워서 세상일에 간여하지 않았던 것을 볼 적마다 그 고매하고 탁월함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경지였다. 드디어는 몇몇 명승지를 그림으로 그려 병풍을 짓고, 이참에 옛날 유람할 적에 지은 칠언절구를 뽑아서 그림에 써서는, 내 다시는 갈 수 없지만 여전히 마음속에 남아 풀리지 않는 그리움을 자위할 따름이다. 상산일로(아호雅號)가 글을 짓다.
자, 1557년 봄에 홍 씨 성을 가진 덕원이란 이와 강원도 여행을 다녀온 뒤에 기억나는 몇 곳을 그려 병풍으로 만들고 칠언절구 시를 써놓았다고 했습니다. 이 글에 등장하는 홍은 조선 명종 대의 무신 홍연(洪淵, ?~?)이란 인물입니다. 이 글을 쓴 이는 자신의 아호(雅號, 본명이나 자 외에 따로 지어 부르는 이름)를 상산일로(商山逸老)라고 밝혀 놓았는데, 이 인물의 신원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어찌됐건 화가가 누군지는 몰라도 그림의 제작 시기와 내력이 분명하게 기록돼 있는 대단히 귀중한 그림이죠. 병풍으로 만들었다고 했으니 이번에 공개된 <경포대도>와 <총석정도> 외에 몇 점이 더 있었던 겁니다.
장소 세 곳에 이름표를 붙여 놓았습니다.
다시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화면 왼쪽 글귀 주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장소를 직접 적어놓은 글씨가 보입니다. 글씨 오른쪽으로 사선봉(四仙峰), 글씨 아래로 사선정(四仙亭), 그 왼쪽 아래로 문자비(文字碑)라고 잘 보이게 적어 놓았습니다. 띠풀 지붕의 사선정과 그 앞의 비석은 작게 그림까지 그려 놓았죠. 당시 여행객들에게 전망대 같은 곳이었을 겁니다.
봉우리 주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새들과 소나무가 그려져 있습니다.
총석정 바위로 눈길을 돌리면 가운데 우뚝 솟은 봉우리 주변으로 여러 마리 새들을 깨알 같이 그려 넣은 것이 보입니다. 그 오른쪽 아래 봉우리에는 잘 생긴 소나무도 한 그루 그려 놓았습니다. 건성으로 그림을 보면 이런 자잘한 것들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죠. 깎아지른 총석정 바위를 시원하게 그러내려간 화가는 이렇게 거기 깃들어 사는 동식물들까지도 섬세하게 그려 넣었답니다. 역시 좋은 그림은 멀리서 봐도 가까이서 봐도 좋다는 말이 틀리지 않은 겁니다.
작가 미상 <경포대도>, 조선 16세기 중반, 축, 비단에 엷은 색, 101.0×54.5cm, 2019년 윤익성․윤광자 기증
이번엔 경포대를 볼까요. 화면 아래쪽에서 경포호를 넘어 화면 위쪽으로 경포대와 오대산을 올려다보는 구도로 그렸습니다. 이 그림 역시 <총석정도>와 마찬가지로 주요 관광지에 이름표를 붙여 놓았습니다. 그림 하단의 오른쪽 해변부터 백사오리(白沙五里), 강문교(江門橋), 청초주(靑草洲), 죽도(竹島), 초당(草堂)까지 다섯 가지 이름이 보입니다.
이 그림에는 꽤 많은 사람이 등장합니다. 과연 몇 명일까요?
<총석정도>와 다른 점은 풍경 안에 꽤 많은 사람을 그려 넣었다는 점입니다. 화면 아래 강문교를 자세히 보면 나귀를 타고 다리를 건너는 나그네 뒤로 심부름꾼이 따르는 모습이 보이고, 그 위로는 호수에 떠 있는 배에 두 사람이 타고 있죠. 여기서 왼쪽으로 비스듬하게 위를 올려다보면 호숫가 언덕에 두 사람이 사이좋게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습니다. <총석정도>에 이름이 등장하는 두 사람, 상산일로와 홍연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화가는 경포대 건물을 굉장히 자세하게 묘사해 놓았습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건 경포대를 세밀한 부분까지 대단히 상세하게 그려 놓았다는 점입니다. 실제 그림에서 이 부분은 돋보기로 보지 않는 한 그렇게까지 자세하게 들여다보기가 어렵습니다. 다행히 지금은 디지털 이미지로 얼마든지 확대해서 관찰할 수 있죠. 제가 박물관에서 제공받은 대용량 파일을 확대해본 것이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선 하나하나에 얼마나 깊은 정성을 들였는지 알 수 있죠.
▍기부금으로 작품을 사들인 첫 기증 사례
이 작품들을 직접 보고 검토한 미술사학자 안휘준 교수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16세기의 대표적인 실경산수화로, 이러한 작품은 한 번 보는 인연도 맺기 힘든 그림”이라며 대단히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귀한 그림들이 도대체 어떤 과정을 거쳐 박물관에 기증된 걸까요?
배기동 국립중앙박물관장과 기증자 후손 오승룡 이사
그림의 기증자가 윤익성, 윤광자 두 분이란 점은 앞서 이미 소개해 드렸죠. 이 분들은 재일교포로 자수성가한 고(故) 윤익성(尹翼成, 1922~1996) 레이크사이드 컨트리클럽 창업주의 유족입니다. 두 분이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사단법인 국립중앙박물관회에 기부금을 출연하는데요. 그러면서 한 가지 조건을 붙입니다.
해외에 있는 우리 문화재를 환수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고 싶습니다.
마침 일본 교토 지역에 전해져온 두 작품을 조사한 박물관 측에서 외부 자문위원의 검토를 거쳐 기증받을 대상으로 선정합니다. 작품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공감한 유족이 선뜻 동의한 것은 물론이고요. 그렇게 해서 국립중앙박물관회가 작품 구매와 운송을 맡아 국내로 환수했고, 그 비용은 바로 고(故) 윤익성 회장의 유족이 출연한 기부금에서 나간 겁니다.
작품을 직접 구매해서 기증한 사례는 그동안 꽤 많았죠. 박물관의 유물 구매 예산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기부금을 내고 박물관이 원하는 작품을 사들이도록 하는 기증 방식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생긴 이래 처음이라고 하더군요. 게다가 기증자들은 조용히 기증하고 싶었다며 한사코 언론 인터뷰를 거절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일본에서 되찾아온 소중한 우리 그림들을 전시회를 통해 마음껏 볼 수 있게 됐으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전시장에 걸려 있는 다른 걸작, 명작들을 제쳐놓고 가장 먼저 이 두 그림 앞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오래오래 작품을 바라보면서 기증한 분들의 고마움을 마음속에 거듭거듭 새겼답니다.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KBS기자.
부족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전국의 문화 유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문화 예술 분야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