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2004년 이마트에 입사하여 과일팀, 축산팀, 건식품팀을 거쳐 현재는 채소팀에서 18년차 신선식품 바이어로 근무하고 있는 그로서리 전문가 오현준 부장입니다.
몇 년 전 아이들과 딸기 농장 체험에 나섰던 적이 있습니다. 빨간 딸기가 주렁주렁 열린 밭이 아이들에게는 신세계였나 봅니다. 잔뜩 신이 나서는 고사리손으로 딸기를 한 바구니 가득 수확했습니다. 평소에는 잘 먹지 않던 딸기가 그날은 어찌나 맛있던지, 종일 딸기 파티가 열렸습니다.
밭에서 갓 수확한 농산물은 신선하고 맛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밭에서 농산물을 수확해 바로 취식할 수 있게 유통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판매가가 엄청나게 높아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트에서 판매하는 상품은 생산 방식, 물류 조건 등을 고려하여 대량으로 취급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도도 중요하지만, 가격도 중요하니까요.
가장 효율적인 유통 과정을 거친다면, 농산물을 수확 후 판매하기까지 최소 하루 이상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그런데 마트 매대에 있는 상품들은 하나같이 다들 싱싱합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걸까요?
이마트 신선상품의 비밀, ‘수확 후 관리’
‘수확 후 관리’는 원물 수확 이후 포장까지의 모든 단계를 일컫습니다. 크게 세척, 선별, 예냉, 포장으로 나눌 수 있는데요. 우리가 마트에서 접하는 농산물은 최소 하나 이상의 과정은 거쳐서 들어왔다고 보시면 됩니다. 수확 후 관리의 목적은 원물 맛의 증진, 품질 및 선도의 향상입니다. 나아가 상품의 가치를 높여 고객에게 더욱 만족스러운 상품을 제공하는 거죠.
농산물은 수확 후에도 생장 활동을 지속하는데요. 계속되면 노화가 촉진되어 조직이 약해지고 짓무름이나 변색 현상이 발생합니다. 특히, 온도가 높고 빛이 강한 곳에서 더욱 빠르게 진행되기 때문에 수확 후에는 원물 겉과 속의 온도를 빠르게 낮추고 빛을 최소화하는 공정을 진행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냉’입니다. 그리고 예냉한 농산물을 필요한 시점에 신선한 상태로 꺼내어 쓰기 위하여 하는 일이 ‘저장’입니다. 예냉과 저장의 조건은 품목별로 조금씩 다르지만, 최대한 빠른 속도로 목표 온도까지 낮춘 후 보관하는 과정은 거의 모든 농산물에 적용됩니다.
대표적인 예냉 방식으로는 ‘강제 통풍식 예냉’, ‘차압식 예냉’ 그리고 ‘진공 예냉’이 있습니다. 강제 통풍식 예냉은 기존 냉장고에 순환하는 송풍량을 보강한 방식으로 상품의 속을 목표 온도까지 떨어뜨리는데 12시간 이상이 걸립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냉각이 적재 위치별로 균일하지 않은 것이 단점이지만 아직까지 두루 사용되고 있습니다. 차압식 예냉은 차압실과 냉각 팬을 설치하고 구멍이 있는 박스에 상품을 담아, 빠르게 순환하는 공기를 박스 구멍으로 통과시키면서 냉각하는 방식입니다. 상품을 직접적으로 냉각하는 방식으로 강제 통풍식 예냉 보다 빠르게 예냉이 가능하며 소요 시간은 5시간 내외입니다.
진공 예냉(Vacuum Cooling)은 가장 최신 방식 중 하나인데요. 30분 내외의 짧은 시간 안에 예냉이 완료됩니다. 진공 예냉을 위해서는 진공 예냉이 가능한 방과 진공을 위한 기압조절 펌프 그리고 냉장을 가할 수 있는 냉각팬이 필요합니다. 성능은 뛰어나지만 갖춰야 할 설비가 많아 설치 비용이 비싼 게 단점입니다. 매장에서 사용하는 팔레트 기준으로 12개 정도가 들어가는 넓이의 설비를 갖추는데만 8억 내외의 비용이 들어가니까요. 마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입산 농산물은 보통 배를 통해 우리나라로 들어오는데요. 수확 후 우리나라에 도착하기까지 통상 2주가 넘는 시간이 소요되는데도, 밭에서 바로 수확한 것처럼 신선합니다. 바로 진공 예냉의 과정을 거치기 때문입니다.
진공 예냉의 기본 원리 ‘증발열’
진공 예냉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는 증발열(蒸發熱)입니다. 증발열은 액체가 기체로 변하면서 주위에서 빼앗는 열량인데요. 열이 날 때 머리에 물수건을 올려 체온을 낮추는 것의 원리와 같습니다. 물이 증발하며 주변의 열을 가지고 가기 때문에 시원해지는 거죠. 진공 예냉도 이처럼 농산물에 묻어있는 물을 빠르게 증발 시켜 온도를 급격히 낮춥니다.
그렇다면 물을 어떻게 빨리 증발시킬 수 있을까요? 물은 분자로 이루어져 있고, 그 분자는 계속해서 운동합니다. 물 분자의 운동량은 고체인 얼음의 상태일 때 가장 적고, 액체인 물의 상태일 때 조금 더 많고, 기체인 수증기 상태일 때 가장 많습니다. 때문에 물 분자를 활발하게 하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온도를 올리거나, 기압을 낮추거나. 온도에 의한 기체 변화는 물이 끓을 때 김이 나는 원리입니다. 이건 많이들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기압에 의한 변화는 높은 산에 올라가 밥을 하면 밥이 설익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물 분자는 기압이 높은 곳보다 낮은 곳에서 더욱 활발하게 운동합니다. 따라서 기압이 높은 산꼭대기에서는 더 낮은 온도에서 물이 끓게 되고, 밥이 설익는 상태가 되는 거죠.
물 분자의 운동이 진공 예냉과 어떤 관계가 있는 걸까요? 양상추를 예로 설명해보겠습니다. 양상추 겉과 속의 온도를 빠르게 내리기 위해 증발열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보통 물을 증발시키려면 어느 정도의 열을 가해야 하는데요. 만약 그렇게 한다면 예냉 이후에 차가운 양상추가 아니라 따끈하게 쪄진 양상추를 얻게 될 것입니다.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낮은 온도에서도 물을 증발시킬 수 있어야 하는데요. 앞서 설명한 산 위에서 밥 짓는 상황을 응용해 보겠습니다. 물 분자의 운동은 기압이 높을수록 줄고 낮을수록 활발해집니다. 그래서 산꼭대기에서는 물이 지면의 끓는점보다 낮은 온도에서 끓습니다. 만약 기압을 산꼭대기보다 낮춘다면, 더 나아가 기압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된다면 물의 끓는점은 더욱 낮아지겠죠?
위의 삼중점 그래프는 이러한 원리를 설명해줍니다. 삼중점은 얼음, 물, 수증기가 공존하는 기압과 온도입니다. 진공 예냉의 경우로만 범위를 좁히면 녹색선인 “증기 압력 곡선”과 관련이 깊은데요. 대표적인 끓는점[A]은 760mmHg(1기압)일 때 100도에서 물이 기화합니다. 그 점에서 녹색선을 따라 [B]점으로 내려가 볼까요? 쭉 내려가서 [B]에 닿았을 때 4.58mmHg에서는 거의 0도 이상의 온도에서 물이 수증기로 변하네요. 이와 같은 조건에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냉장이라고 생각하는 0~10도의 온도에서도 물을 증발시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증발열을 이용해 양상추의 열을 빼앗아 빠르게 예냉을 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공 예냉의 원리입니다. 기본적인 물리학적 원리를 설비를 통해 적용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수확 후 관리’ 방법
예냉 과정을 거친 상품은 ‘저장’ 단계로 이동합니다. 저장은 선도가 민감한 신선상품을 필요한 시점에 꺼내서 사용하기 위해 필요합니다. 특히, 사과나 배 같이 가을에 수확하여 이듬해 여름까지 판매하는 상품은 저장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고객 반응이나 수익 비중이 크게 차이 납니다. 때문에 원하는 시점에 꺼내도 수확 시점의 신선도가 유지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마트 후레쉬센터도 10년 전부터 CA저장방식을 도입, 적극적으로 이용하며 더욱 우수한 상품 출고를 위해 조금씩 운영 방법도 개선하고 있습니다. 자연 상태의 대기는 질소 78%, 산소 21%, 기타 1%의 비율로 조성되어 있는데요. CA저장고는 내부 공기를 질소 85∼92%, 이산화탄소 5∼8%, 산소 3∼7%, 기타 1%로 조정해 신선상품 보관에 최적화했습니다. 처음에는 사과나 배 위주로 CA저장법을 적용했지만 지금은 수박까지 저장하고 있습니다. 장마 전 비를 맞지 않은 수박을 매입하여 CA저장을 하고 장마 기간 동안 지속해서 고품질의 상품을 공급하는 것입니다. 덕분에 비가 와도 맛있는 수박을 원하는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습니다.
품질 유지를 위해서는 저장 이전에 ‘큐어링’이라는 단계를 거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주로 고구마에 적용하는 수확 후 관리 방식인데요. 상처의 치료를 뜻하는 큐어(cure)라는 단어에서 온 말입니다. 보통 고구마는 8~9월에 수확 후 다음해 4~5월까지 장기로 저장됩니다. 갓 수확한 햇고구마는 수분이 많고 연해 표피도 잘 벗겨지고 상처도 쉽게 생기는데요. 여기에 곰팡이나 세균이 번식하면 저장 중 부패가 일어나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한 전처리 과정인 큐어링 작업이 필요합니다.
큐어링 처리를 한 고구마는 상처 난 부위 아래쪽 표피에 새로운 살이 올라오게 됩니다. 이 과정을 거친 고구마는 그렇지 않은 고구마에 비해 중량 손실은 약 30% 정도, 곰팡이나 짓무름 발생은 약 10배 정도 개선되었습니다. 이마트 후레쉬센터에서도 고구마에 큐어링 처리를 하고 있는데요. 약 3일간 35도의 고온에서 생육과 재배 시 상처 난 부분을 치료합니다. 내년 초 고구마를 드실 때 이러한 과정을 거친 고구마라는 걸 알고 드신다면 더욱 맛있게 드실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알아볼 과정은 ‘당도 선별’입니다. 당도는 과일 맛의 기준입니다. 당의 농도를 대략적으로 측정하는 단위를 브릭스(Brix)라고 합니다. 100g의 용액 속에 당이 얼마나 들어있는지 나타내는 단위인데요. 주스 100g 안에 당분이 총 25g 들어있으면 25브릭스라고 표시하는 방식으로 %와 유사한 단위라고 보면 됩니다.
과거에는 과일을 갈아낸 즙의 당도를 직접 측정하는 ‘파괴 당도기’를 사용했습니다. 때문에 모든 상품을 파괴해 당도선별을 할 수 없으니 샘플로 측정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샘플을 통해 전체를 판단했기 때문에 오차가 상당했습니다. 기술의 발전으로 수년 전부터는 빛을 쏘아 받는 피드백으로 당도를 측정할 수 있는 ‘비파괴 당도선별기’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비파괴 당도 선별기도 오차가 존재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당도 선별 과정 이전에 바이어들이 농장의 재배 환경을 확인하고, 기존에 쌓아온 다양한 데이터를 비교·분석하면서 매입 여부를 결정합니다. 이것이 1차 선별 과정이라 할 수 있죠. 비파괴 당도선별기로 당도를 측정하는 과정은 선별과정을 거쳐 들어온 상품을 다시 검증하는 하나의 절차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신선 농산물의 수확 후 관리에 대한 다양한 과정들을 알아봤습니다. 대부분의 고객이 농산물을 구매할 때 고려하는 부분은 신선함, 맛 그리고 저렴한 가격이 아닐까 싶은데요. 이러한 조건은 농부의 재배 방식이나 자연환경 등으로만 충족되는 사항이 아닙니다. 농산물을 수확한 후에 어떻게 관리하느냐도 매우 중요합니다.
현대의 첨단 기술은 재배 환경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당도를 보장하는 고당도 품종 개발이나 자연 조건에 관계없이 균일한 재배 환경을 만들어주는 스마트 팜 등이 예입니다. 이에 맞춰 이마트도 수확 후 관리 측면에 고도화된 기술을 지속해서 도입하고 있는데요. 날씨에 상관없이 선도 유지 기간을 늘리고 저장 이후 불량 상품을 최소화하고 당도 선별의 정확도를 높여 누구나 만족할 수 있는 상향 평준화된 신선 농산물 공급을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재배와 수확 후 관리 기술이 균형 있게 발전을 이루어,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신선하고 맛있는 농산물을 구매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오현준 이마트 채소 바이어
농부와 직장인 중간계의 삶, 신선살이 18년.
과일, 축산 찍고 건식품 돌아 채소합니다.
10년 넘게 좋은 것만 먹었더니 왠만한 건 맛없음.
이 느낌 그대로 전달해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