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최종전. 9회말 2아웃 2스트라이크 2볼.
타석과 마운드에서 서로를 매섭게 바라보는 두 선수 간에 미묘한 감정이 교차한다. 경기장을 쩌렁 쩌렁 울리는 응원단의 앰프 소리는 이미 귀에 들리지 않는다. 오로지 심장의 고동(鼓動)소리 만이 그 속도를 더할 뿐. 이윽고 투수의 손 끝을 떠난 백구(白球)가 부쩍 차가워진 가을의 밤공기를 가르며 한 줄기 빛이 되어 타자의 무릎 쪽을 향해 무섭게 날아든다. 번쩍이는 스윙과 함께 이어지는 파열음. 경기장을 휘감고 있던 짧은 침묵이 깨어지며 모두의 눈이 높다랗게 포물선을 그린 채 파울라인 바깥을 향하는 공의 움직임을 쫓는다. ‘제발… 제발…’ 간절하게 두 손을 모은 팬들의 마음 속의 공의 궤적은 이미 외야 펜스를 훌쩍 넘어간 지 오래다.
“아웃!”
상대팀 선수의 글러브 속으로 공이 사라지자마자 매정한 심판의 콜이 경기장을 가로질러 연신 마른 침을 삼키고 있던 선수들과 팬들의 가슴 속에 날아와 꽂힌다. 가을야구행 티켓을 거머쥐기까지 불과 한 걸음, 여러 선배 구단들이 쉬이 해내지 못했던 창단 첫 해 포스트시즌 진출이라는 위업(偉業)을 달성하기까지 정말 딱 한 걸음 남았었는데…
신생(新生)구단으로서 많은 이들의 주목을 끌며 찬란하게 빛났던, 그리고 때로는 치열하게 불타올랐던 SSG 랜더스의 정규시즌은 아쉬움 속에 마무리 되었다.
시즌 종료, 새로운 시작을 위한 또 하나의 출발선
한국시리즈를 제패(制覇)한 단 하나의 구단에게만 허락되는 왕좌(王座), 챔피언. 이렇듯 한정된 영광의 자리를 놓고 KBO리그 내 10개 구단들은 매 시즌마다 홈 구장과 원정 구장에서 각 72번씩, 모두 144번의 혈투를 치르면서 치열하게 경합(競合)한다. 시즌 시작 전에는 모두가 우승 후보다. 그러나 승(勝)과 패(敗)는 야구가(野球家)의 상사(常事)인지라 시즌의 종착점(終着點)에 이르게 되면 누군가는 발걸음을 멈출 수 밖에 없다. 무거운 침묵이 이어질 것 같지만 사실 슬퍼할 겨를이 없다. 지금 서 있는 이 곳은 바로 새로운 시작을 위한 또 하나의 출발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기회를 영광으로 잇는 것은 오로지 준비된 자 만이 누릴 수 있는 몫. 오늘의 패자(敗者)가 내일의 승자(勝者)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은 늘 열려있다. 역전 만루홈런은 프로야구의 묘미(妙味)이자 진미(珍味)라고 하지 않던가. 연공서열 파괴의 시대. 신생구단이 40여 년의 연륜(年輪)이 쌓인 선배 구단들을 훌쩍 뛰어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오늘날 MZ세대의 당찬 기세가 바로 그러하듯이. 그렇기에 많은 이들은 프로야구를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일컫는다. KBO리그의 MZ세대인 SSG 랜더스. 앞으로도 이어질 이들의 찬연(燦然)한 기세는 향후 어떠한 족적을 남기게 될 것인가.
40년 역사의 KBO리그와 신생 ㈜신세계야구단의 등장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젊은이들에게는 낭만을, 국민들에게는 여가 선용을!”
지난 1982년, 위의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운 정부의 주도 하에 한국야구선수권대회(2015년부터 現 KBO리그 브랜드 사용)가 창설되었다. 보고 즐길 것이 턱 없이 부족했던 시절, 정부는 실업야구리그에 주목하였다.
때 마침 야구인들을 중심으로 프로화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던 터라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리그 창설 자금은 대기업이 주식회사의 형태로 계열사 팀을 창단하여 참여하는 방식으로 충당되었다. 비즈니스 모델 정립(定立)은커녕 합리적인 수익-비용 구조에 대한 고민조차 할 겨를도 없이.
모든 비즈니스의 출발점은 고객이다. 이것은 불변의 진리이다. 그렇기에 과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성공적으로 비즈니스를 영위하고 있는 수많은 기업들은 항상 고객의 불편한 점(pain point)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그리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솔루션(또는 pain killer)으로 고객들이 원하고(wants), 필요로 하는 것(needs)을 최적의 상품과 서비스의 형태로 구성하여 제공한다. 만족스러운 가치(value)를 성공적으로 얻은 고객은 기꺼이 지갑을 열고 이에 상응하는 비용을 지불한다. 이는 곧 기업의 이익이 되어 비즈니스 선순환(善循環)의 고리를 만들고 또 강화시키는 재원(財源)이 된다.
이러한 이유로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은 2021년 신년사에서 ‘신세계그룹에게 고객은 불요불굴(不撓不屈)의 유일한 대상’이라고 강조함과 동시에 ‘고객의 요구에 대한 광적인 집중(Customer Obsession)’을 임직원들에게 요구한 바 있다.
이에 반해 국내 프로야구는 자의적(恣意的)으로 상품과 서비스를 구성한 뒤 이를 수용하는 고객만을 가려 받는 형태로 산업을 전개했다. 불안정한 수익/비용 구조를 상쇄시키는 모기업의 지원금은 불멸(不滅)이라는 허상을 짙게 드리웠다. 주식회사로서의 본분을 되찾고자 했던 일부의 노력은 현실 안주(安住)의 분위기에 밀려 안타깝게 흩어졌다. 관성(慣性)과 관습(慣習)은 2008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획득이 선사한 야구 붐(Boom)이라는 호기마저 무심히 흘려 보내고 말았다.
‘오늘날 프로야구단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국민들의 여가 선용’이라는 40년 전의 대답을 그대로 유지할 수는 없다. 국내 프로야구 산업은 스포츠와 산업이라는 두 단어 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타 콘텐츠와의 치열한 경쟁이라는 시류(時流)와 COVID-19 사태라는 원 투 펀치를 맞고 크게 휘청이고 있다.
이러한 혼돈의 시기에 ‘세상에 없던 프로야구의 시작, No Limits, Amazing Landers!’라는 기치(旗幟)를 내걸고 주식회사 신세계야구단(SSG 랜더스)이 보무(步武)도 당당히 등장하였다.
Sense Breaking, Sense Giving, Sense Making
“우리가 한 마음으로 고객과 팬을 위해 광적으로 집중한다면 SSG 랜더스를 ‘꿈이 현실이 되는 야구단’으로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신세계는 여러분들의 도전에 언제나 든든한 조력자가 될 것입니다.”
SSG 랜더스 정용진 구단주의 자신감 넘치는 창단 일성(一聲)은 프로야구의 현 상황에 불안(不安)을 느끼고 있던 많은 이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40여 년의 시간 동안 한국 프로야구가 진화(進化)에 대한 갈망조차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들의 기대에 부응하듯 SSG 랜더스는 등장 첫해부터 모두가 기다렸던 게임체인저(Game Changer)로서의 당찬 행보를 선보였다.
창단 후 영입 1호 선수로 현역 메이저리거 추신수를 선택한 것은 그 신호탄이었다. 그가 지닌 야구인으로서의 상징성은 물론, 팬 중심적 성향과 클럽하우스의 리더로서 야구를 대하는 진정성은 신생 SSG 랜더스가 지향하는 바 그 자체였다. 이후 추 선수는 세간의 기대에 부응하듯 역대 최고령 20-20이라는 대기록과 함께 인상적인 미담들을 남기며 팀의 주축으로 맹활약하였다.
여러 계열사들과 협업하여 진행했던 다양한 행사들도 올 시즌 내내 큰 화젯거리였다. 랜더스데이, 랜디쓱데이, 구단창단 100일기념 홈런데e, 세계 최초 야구장 내 스타벅스 입점, 다양한 얼터너티브 유니폼 출시 (랜더스벅, 푸빌라, 이마트 레트로, 밀리터리 등), 노브랜드 버거 100호점 입점, 이마트24 ‘최신맥주’ 및 창단 기념 순금NFT 출시 등 신세계그룹은 자신들만이 제공할 수 있는 고객가치가 무엇인지를 SSG 랜더스라는 역동적인 접점을 통해 유감없이 선보였다.
COVID-19 사태는 분명 이들에게 많은 제약을 가했다. 그러나 축적(蓄積)의 시간을 통해 갖추게 된 리테일 전문기업의 내공(內功)은 어떠한 형태의 모진 풍파(風波)에도 쉬이 흔들리지 않는 것임을 이들은 랜더스와의 협업 프로젝트를 통해 성공적으로 증명해냈다. 그리고 프로야구단이 모기업의 지향점인 ‘신세계 유니버스’의 완성을 돕는 주요 접점으로 충실히 기능할 수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검증하였다.
SSG 랜더스와 신세계그룹은 온라인과 오프라인 양 채널의 경계를 무너뜨리며(Seamless) 활기차게 프로젝트를 전개했다. 뉴 노멀(New Normal) 시대의 비즈니스와 마케팅이 무엇인지 보여줬다.
홈 팀, 원정 팀 구분 없이 경기장을 찾은 모든 퓨처스 선수들을 후원했던 노브랜드의 행보는 많은 이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여기에 더해 아마야구 발전을 위해 거액의 후원금을 희사(喜捨)한 것은 물론, 최정 선수의 400홈런 위업을 그룹 내 구성원 모두가 진심으로 축하하고 기념하는 모습에 수 많은 야구팬들과 업계 내 종사자들 그리고 신세계그룹의 매장들을 찾은 고객들은 적지 않은 감동을 받았다. 특히 구단주가 직접 야구장을 찾아 최정 선수에게 전달한 60돈 순금 메달과 ‘마이 히어로’라는 메시지, 그리고 스타필드 중앙 아트리 홀 미디어 타워에 게재되었던 축하 광고는 그야말로 백미(白眉)였다.
뜻하지 않은 부상으로 인해 힘겨워 하는 선수들에 대한 구단주의 따뜻한 관심과 배려 또한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지난 10월 12일, 팔꿈치 수술을 받고 재활 중이던 박종훈, 문승원 선수를 초대하여 직접 만든 요리를 대접한 것이다. 전 세계 프로스포츠 리그를 통틀어 이와 유사한 사례가 있었던가. 우리는 어쩌면 세상에 없던 프로야구뿐만 아니라 세상에 없던 구단주의 출현을 목격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야구할 맛이 절로 나는 분위기의 조성, SSG 랜더스와 신세계그룹 계열사들, 그리고 구단주의 진정성 어린 행보는 국내 프로야구 산업에 묵직한 울림을 선사하였다.
기존 프로야구 비즈니스의 그릇된 통념을 깨뜨리고(Sense Breaking), 리테일 전문기업의 역량을 더한 뒤(Sense Giving)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Sense Making)하는 것은 분명 만만찮은 과업이다. 생각 이상으로 인고(忍苦)의 시간을 요구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많은 야구팬들이 신세계그룹과 SSG 랜더스의 행보에 주목하는 것은 이들의 DNA 속에 대담한 사고로 도전을 거듭하며 오로지 고객가치 창출을 지향하고자 하는 정신이 굳건히 자리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프로야구 비즈니스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신세계그룹으로부터
단계적 일상회복(With Corona)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모두가 바삐 움직이고 있다. COVID-19 사태가 남긴 상처는 미처 추스르기 힘들 만큼 크고도 깊다. 우리는 전쟁 전과 후의 세상이 절대 같을 수 없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폐허 위엔 언제 그랬냐는 듯 새로운 시대상이 반영된 건물들이 들어선다. Post COVID-19라 일컬어질 세상 또한 마찬가지이다. 기존의 패러다임은 자취를 감추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된다.
프로야구 산업 또한 예외일 수 없다. 너무나도 혹독했던 시기에 첫 발을 내디뎠던 SSG 랜더스는 기존의 패러다임이 잉태한 무관중 경기라는 전례 없는 제약 속에서도 본연의 미션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오는 2022년에 마주하게 될 프로야구 비즈니스의 환경은 지금보다는 조금 더 유연하고 활력 넘칠 것이다.
새로운 소비권력으로 MZ세대가 급부상 중이다. 이들은 디지털 유목민과 원주민으로 일컬어질 만큼 디지털 기기와 온라인에 익숙한 세대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힙(hip)’한 오프라인 공간에 누구보다 열광하는 세대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No.1 라이프스타일 기업인 신세계그룹은 이러한 추세에 발 맞춰 쓱닷컴(SSG.com)과 옥션, 그리고 G마켓이라는 대한민국 대표 온라인 채널과 이마트, 스타필드, 스타벅스로 상징되는 인기 오프라인 채널을 옴니채널로서 지속 성장, 발전시켜오고 있다.
SSG 랜더스는 향후 이러한 신세계 유니버스의 역동적 고객 접점으로서 충실히 기능하며 Post COVID-19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프로야구 비즈니스 패러다임을 KBO리그의 구성원들에게 제시하게 될 것이다. 팬들의 사랑과 구단주의 강한 의지 속에서 리그를 선도하는 게임체인저로 훌륭히 진화(進化)해 나갈 SSG 랜더스의 향후 행보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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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민 연구원
한국과학기술원(KAIST) 경영대학 MBA
프로스포츠 비즈니스 전문 컨설턴트
(前) 롯데자이언츠 마케팅 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