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20년도 더 전의 이야기다. 1999년에서 2000년으로, 한 세기가 끝나고 새로운 천년이 시작된다는 사실은 많은 이들에게 설렘만큼 큰 두려움이었다. 세상은 온갖 종말론으로 들썩였다.
‘Y2K’ 역시 그중 하나다. Y2K는 ‘Year 2000’의 줄임말로, Y는 연도(Year), K는 1000(Kilo)을 뜻한다. 사람들은 연도를 마지막 두 자리로만 표기하는 컴퓨터가 2000년의 연도를 1900년으로 인식해 사회적 혼란을 야기한다고 우려했다.
하지만 여러 우려와는 달리 1999년의 마지막 날은 비교적 조용히 지나갔고, 그렇게 21세기가 시작됐다. 그리고 2021년. 2000년의 상징으로 박제됐던 Y2K가 다시 돌아왔다. 그것도 IT업계가 아닌 패션 업계로 말이다. 세기말을 떠들썩하게 흔들었던 컴퓨터 버그가 대체 패션과 어떤 관련이 있다는 말인가?
패션은 시대를 담는다. 2000년대 초 인기를 끌었던 패션에도 이른바 ‘세기말 감성’이 고스란히 묻어있다. 그 특유의 감성은 ‘미래지향적 요소’와 합해지며 화려하면서도 독특한 스타일을 만들었다. 골반에 걸쳐 입는 로라이즈 청바지, 배꼽이 보이는 크롭티, 컬러풀하고 볼드한 액세서리 등이 대표적인 예다.
20년 전 밀레니엄 시대를 풍미했던 이 패션은 현재, ‘Y2K 패션’이라는 이름으로 Z세대 사이에서 인기다. 소셜 미디어 인스타그램에는 관련 해시태그만 수 백만 개에 달한다. Z세대를 사로잡은 X세대의 감성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부활했을까?
#1. 쥬시 꾸뛰르(Juicy Couture)
국내에서 Y2K 패션의 붐업을 선도한 것은 Z세대를 대표하는 패션 아이콘, 블랙핑크의 멤버 제니다. 지난 8월, 제니가 SNS에 올린 사진 한 장은 우리나라에도 Y2K 패션이 새로운 트렌드로 상륙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제니가 입었던 초록색 벨벳 트랙수트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가수 이효리·렉시·길건 등을 중심으로 X세대 사이에서 유행했던 ‘그 시절 그 스타일’이 제니를 필두로 한 Z세대의 가장 힙한 스타일로 등극한 것이다.
상·하의 색을 맞춘 벨벳 소재의 화려한 트랙 수트 패션. 그 원조는 브리트니 스피어스, 패리스 힐튼 등이 즐겨 입던 ‘쥬시 꾸뛰르(Juicy Couture)’다. 지난 8월 신세계인터내셔날 공식 수입·판매하는 쥬시 꾸뛰르는 다시 찾은 영광을 기념하듯, 특유의 밀레니엄 감성을 살린 ‘글로벌 컬렉션’을 선보였다.
이 컬렉션은 시그니처 아이템인 벨벳 트레이닝복을 FW상품 물량의 20% 이상으로 구성했다. 쥬시 꾸뛰르 특유의 화려한 장식과 대담한 컬러 믹스가 돋보이며, 여성적인 라인을 살린 디자인이 특징이다. 또한, 조거 팬츠, 후드, 티셔츠, 집업 재킷, 크롭탑 등의 세부 구성을 대폭 확대했다. 여러 제품 중 원하는 제품을 따로 또 같이 조합해, 나만의 스타일로 입을 수 있다.
쥬시 꾸뛰르와 어그를 활용해 Y2K 패션을 선보인 유튜버 free지아
#2. 어그 (UGG)
신세계인터내셔날이 공식 수입·판매하는 어그(UGG) 역시 빼놓을 수 없는 Y2K 패션 아이템이다. 어그는 2000년대 초 한 드라마에서 배우 임수정이 착용한 후, 큰 인기를 끈 브랜드다. 천연 양털이 들어간 따뜻한 양피 부츠로 유명하며, 패션 아이템으로는 물론 방한용품으로도 사랑받았다.
한동안 잊혀졌던 어그는 최근 ‘뉴트로(Newtro)* 열풍’의 중심 브랜드로 우뚝 섰다. 롱패딩 대신 숏패딩을 찾는 Z세대들이 하의 코디를 위해 어그를 찾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20년 전과 다른 점은 어떤 옷에도 편하게 신을 수 있는 발목 기장의 짧은 디자인이 유행한다는 것이다.
*뉴트로(Newtro) : 새로움(New)과 복고(Retro)를 합친 신조어로 복고를 새롭게 해석하고 즐긴다는 뜻으로 오래된 것들에 현대적 가치를 입힌다는 개념
작년부터 부활의 조짐을 확인한 어그는 올해 역시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2021 SS 컬렉션에서는 몰리 고다드(Molly Goddard), FW 컬렉션에서는 텔파(Telfar) 같은 최신 유행 브랜드와 협업하며 그 인기를 이어가는 중이다.
지난 10월 공개된 텔파와 어그의 협업 컬렉션에서는 두 브랜드의 아이코닉한 특징이 잘 조합되어있다. 텔파의 ‘T’ 로고와 함께, 어그 특유의 컬러와 시어링 트리밍을 더해 마감한 디자인이 눈에 띈다. 제품군은 두 브랜드의 핵심적인 요소를 결합해 어그 부츠, 후디, 버킷햇, 토트백, 티셔츠, 속옷 등으로 구성됐다. 어그 x 텔파 2021 FW 컬렉션의 소비자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판매를 시작하자마자 단 몇 분 만에 솔드아웃된 제품도 있을 정도다.
#3. 노티카(Nautica)
이렇듯 세계적으로 Y2K 패션이 인기를 끌며, 국내 패션 업계에서도 반가운 소식들이 들려오고 있다. 한물간 브랜드로 취급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추억의 브랜드들이 국내 시장에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이다. 대표적인 리론칭 브랜드로 전지현 데님으로 이름을 날렸던 청바지 브랜드 ‘트루릴리전(TRUE RELIGION)’과 톱스타 등용문으로 유명했던 브랜드 ‘스톰(STORM)’ 등이 있다.
90년대를 풍미했던 글로벌 캐주얼 브랜드 ‘노티카(Nautica)’도 컴백 행렬에 동참했다. 신세계인터내셔날은 노티카의 국내 판권을 확보하고, 2021년 상반기부터 온라인 전용 브랜드로 운영 중이다.
강남 X세대 힙합 패션의 대표주자였던 노티카는 이제 루즈핏과 오버핏을 선호하는 Z세대 스트릿 패션의 대표주자가 되었다. 지난 9월 공개한 FW 컬렉션에서는 웹 예능 ‘고등학생 간지대회’ 출연자 4명과 협업한 룩북 콘텐츠도 함께 선보였다. 출연자들이 직접 신제품 기획부터 스타일링, 모델로 참여하며 Z세대만의 감성과 개성을 녹여낸 것이 특징이다.
2021년 8월 발매한 Weeked(위켄드) 뮤직 비디오에서 Y2K 패션을 선보인 가수 태연
Y2K 패션은 단순한 ‘레트로 현상’이 아니다. ‘향수’라는 감정으로 그때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레트로 문화와는 달리, Y2K 패션은 그 시절을 경험해본 적 없는 Z세대를 중심으로 향유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디지털 미디어 매체인 Plethora Network는 이 현상에 대해 “코로나 19로 외부 활동이 제한되면서 소셜 미디어에 더욱 의존하게 된 Z세대가 대중문화가 번성했던 2000년대 초반의 문화를 ‘틱톡’에서 발견하고, 당시의 청춘 문화와 패션을 신선하고 매력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Z세대는 Y2K 패션을 과거의 스타일이 아닌 독특하고 개성 있는 ‘힙’한 스타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패션은 이렇게 돌고 돈다. 영원히 ‘흑역사’로 묻힐 줄만 알았던 2000년대 패션이 Y2K 패션이라는 Z세대의 문화로 새롭게 태어났다. 이번 주말에는 OTT에서 다시 유행하고 있다는 <클루리스>나 <킹카로 살아남는 법>, <가십걸>을 다시 한번 보자. Y2K 패션이 새롭게 느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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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민경 신세계인터내셔날 10MONTH 팀장
오래도록 설레는 브랜드를 만들고 있습니다
패션&라이프스타일 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