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유재덕은 요리사다. 1992년 입사해 31년째 조선호텔의 주방에서 일하고 있다. 요즘 밖에 나가선 이런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다. 돌아오는 사람들의 반응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네? 삼 십년을 한 호텔의 주방에서? 와우! 대단하네요.” 말은 대단하다지만, 마치 서커스단원이라도 만난 듯한 눈이다.
예전에 <달인>이라는 제목의 코미디가 있었다. 김병만이라는 개그맨의 대표작 중 하나다.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달인은 매번 하는 일이 바뀌었다. 그는 매번 한 가지 행위만을 16년 동안 했다며 뻥을 쳤다. 나는 <달인>을 볼 때마다 생각했다. 나 역시 코미디 속의 달인과 별다를 바가 없다고 말이다. 그땐 웃음으로 보았지만, 세월이 흐르자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달인을 보며 인생을 성찰했다. 아마추어를 벗어나 프로페셔널이 되기 위해 사생결단으로 사는 것. 코미디는 바로 그 지점을 조롱했다. 바로 이런 면 때문에 나는 김병만의 <달인>을 ‘위대한 코미디’라고 부른다. 스페셜리스트(전문가)의 시대가 저물고 제너럴리스트(교양인)의 시대가 왔음을 알린, 당대의 문명사적인 변화를 감지한 코미디였다. 김병만의 <달인>을 보며, 나는 ‘달인’이 20세기까지의 인간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21세기엔 모든 전문가들이 기예가 아닌 ‘교양’으로 차별화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책을 다시 손에 들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책을 읽다 보니 글도 써보고 싶어졌고, 신문에 연재할 기회를 얻었다. 4년여의 연재를 마치고 지난 2019년 연말에 나온 책이 바로 <독서주방>이다. 책을 내고 이어 <조선일보>의 인기 코너인 ‘일사일언’에 18주 동안 칼럼을 연재하자,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났다. 나를 둘러싼 모든 색채가 순식간에 바뀐 느낌이랄까.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나에게 주방 도구나 음식 재료로 펼칠 수 있는 서커스 따위를 기대하지 않는다. 대신 내가 무슨 책을 읽었는지, 내가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지, 내가 무슨 영화와 드라마를 보고, 심지어 어떤 음악과 그림을 좋아하는지까지 궁금해한다. 비록 사소한 변화지만, 이전보다 무거워진 책임감을 나는 느낀다. 주방에서 재료를 손질할 때도, 집에서 드라마 하나를 보더라도, 사람들에게 들려줄 재미와 의미를 찾는다. 이런 일상 속의 집중은 내 삶을 더욱 밀도 있게 만드는 듯하다.
백이진 : (방 가운데 놓인 밥상을 내려다본다) 이게 뭐야?
(밥상 위에 붙어 있는 승완의 쪽지엔 이렇게 쓰여 있다)
‘뇌물 주는 버릇 못 고쳐요’백이진 :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독백) 아니, 이거 주거침입 아니야? 씨…
최근 종영한 화제의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한 장면이다.
백이진은 방송국에 막 입사한 신입 기자다. 그는 원래 부잣집 도련님이었지만 IMF 때 폭삭 망한 집안의 장남이다. 가난한 그는 학교 후배 승완의 집 단칸방에서 자취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후배 승완은 이진이 자신의 절친인 펜싱부의 다큐 촬영을 위해 곧 바닷가로 떠날 계획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자 승완은 그 촬영 스케줄에 따라가고 싶어 이진을 조르고 있는 상황이다. 다시 드라마의 장면 속으로 들어가 보자. 이진은 승완의 의도를 알기에 잔뜩 찌푸린 얼굴이지만, 맛있게 차려진 집밥을 거절할 수가 없다. 그는 승완이 차려 놓은 5첩반상을 먹으며 말한다.
백이진 : 아 이 자식 나쁜 버릇을 이걸 어떻게 고쳐 줘야 되는 거야?
장면이 바뀌고 다음 날 퇴근 시간. 백이진의 자취방에는 어제와 똑같은 밥상이 차려져 있다. 백이진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다시 한번 얼굴을 구긴다. 입으로는 “하, 얘 진짜 안 되겠네”라고 말하지만, 차려진 밥을 신나게 먹는다. 이진의 얼굴엔 이젠 미소가 가득하다. 다음 날에도 똑같은 밥상. 이번엔 소시지 반찬까지 올라가 있다. 이진은 그 밥상을 보면서 “미치겠다”고 말한다. 그리곤 아주 맛있게 먹는다.
그런데 나흘째가 되던 날, 자취방에 돌아온 이진은 자신의 입을 주먹으로 틀어막으며 크게 놀란다. 밥상이 차려져 있지 않은 빈 방바닥. 이진은 금방 눈물이라도 터져나올 듯한 표정을 짓는다. 곧장 주인집으로 뛰어 올라가 문을 두드리며 승완을 불러낸다. 그리곤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승완에게 소리친다.
백이진 : 야, 네가 진짜 악질인게 뭔 줄 알아? 집밥으로 자취생한테 장난을 쳤다는 거야!
난 이 장면에서 정말이지 큰 소리로 웃었다. 드라마에 푹 빠져 정신없이 폭소를 터뜨리고 있는 나를 아내는 기가차다는 듯이 쳐다본다. 그러다 아내가 말했다. “자취하던 총각 시절 떠오르나봐?” 그때 아내에겐 그저 눈으로만 답하고 말았지만, 사실 내가 떠올린 문장은 이런 것이었다.
‘당신의 집밥을 먹을 수 없다면, 나 역시 ‘입틀막’ 포즈를 시전하며 마구 울지도 몰라.’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몇 년의 시간이 흐르자 어머니의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쩌면 내 기억 속의 어머니가 여러 모습이라서 그런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내 가슴에 젊은 시절의 모습으로도 계시고, 중년이나 노년의 모습으로도 계신다. 대신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이 가장 구체화되는 것은 어머니의 음식이 떠올랐을 때다. 이 기억은 냄새이기도 하고 온기이기도 하다. 그리움은 이미지로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내가 늘 ‘요리’보다 ‘음식’이 훨씬 상위의 존재라고 여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 집밥은 바로 그런 것이다.
요리는 특별한 것이지만 음식은 위대하다. 요리는 맛을 주지만 음식은 생명을 주기 때문이다. 요리가 인생의 빛나는 장면이 될 수 있다면, 음식은 우리의 인생 전체가 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프로페셔널 요리사지만, 나보다 훨씬 높은 자리에 아마추어 음식가들이 있다고 여긴다. 그분들은 사람이 먹는 것 안에 사랑과 생명과 인생까지 녹여 넣으니까 말이다. 나는 세상의 요리사들에게는 그다지 선망이 없다. 물론 세상에 나보다 뛰어난 실력의 요리사들은 많다, 하지만 요리는 내가 열심을 다하면 얼마든지 따라갈 수 있다. 하지만 ‘위대한 아마추어 요리사’들의 음식은 노력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게 되려면 마음이 있어야 하고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깨달음을 통해 어떤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집밥처럼 위대한 요리! 살아 있는 동안 꼭 만들어 보고 싶다.
겁도 없이 다시 연재를 시작한다. 첫 회인 본 칼럼은 앞으로 이어질 전체 칼럼의 인트로에 해당한다. 드라마, 영화, 음악, 미술, 문학 등 다양한 예술 문화를 모티브로 호텔 요리사의 시선과 주방이라는 창을 통해 바라본 이야기를 써보려고 한다. 다음 회는 우리의 자부심, ‘조선 팰리스’ 오픈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를 다룬다. 새로운 외형이 세워지고, 그 공간을 아름다운 레스토랑들이 채워나가며 호텔이 완성되어 간 과정을, 그리고 그 의미를, 요리사의 시선으로 기록해 담아볼 계획이다. 한가지 힌트를 드리자면 2회의 모티브는 ‘영화’다. <존 윅>의 독특한 세계관을 상징하는 공간인 ‘콘티넨탈 호텔’ 이야기로 시작할 것이다.
‘Si vis pacem, para bellum(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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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덕 조선 팰리스 EXECUTIVE CHEF
“요리는 특별한 것이지만, 음식은 위대한 것이다!”
100여 년 전통의 조선호텔앤리조트에서
지난 30년간 함께 역사를 쌓아가고 있다